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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29. 2023

장기여행은 필요할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다.

누군가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인지 물어본다면 바로 대답이 탁! 나올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 내 인생의 가장 황금기는 25-28살이 아닐까 싶다. 저 시기의 나는 정말 치열하게 일하고 그보다 죽도록 술을 마시며 지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취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뭐. 남들이 하는 건 뭐든 다 하고 싶어 하는 성미 덕에 여행도 원 없이 해본 것 같다. 그 시절의 한 축에는 바르셀로나라는 도시가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간 것은 2015년 겨울이었다. 마드리드로 입국한 뒤 포르투갈을 거쳐 다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전부 훑은 뒤에야 바르셀로나에 도착을 했다. 당시에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나면서 유럽 내에서도 경계가 엄청나게 삼엄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표를 예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본래의 일정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에서 경찰들이 칸마다 얼굴 확인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래보나 저래보나 파워 아시안 걸인 나는 경찰의 눈은 쏙쏙 피해 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려움이 따르는 여행이었다. 여행자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와중에 바르셀로나는 진하게도 황홀했다.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져 있으면서 유럽의 낭만과 감성이 속속들이 숨 쉬고 있었다. 바다가 있는 도시 중에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들어가는 시기였어서 도시 곳곳이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넘쳐났다. 그곳에서 여행의 피로를 풀며 다음번 바르셀로나행을 기약하고 있었다. 난 이곳에 반드시 또 올 것이야! (그렇게 딱 1년 뒤 바르셀로나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ㅎㅎ)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대화를 나누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대화가 있을 때면 장기여행을 다녀온 나는 그 대화에서 화두의 인물(?)로 서게 되곤 했었다. 그럼 이런 질문들을 한다. 인생에서 장기여행을 꼭 해봐야 하나요?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남들이 하니까 저도 한 번 해보는 게 좋을까요? 나는 여기서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청춘을 보내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귀한 시간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장기 여행이라고 하면 보통은 대학 때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가던가 다니던 회사를 떠나고 자아를 찾는 여행이던가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좀 쉬운 편이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진취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플러스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자는 다르다. 퇴사를 하고 몇 달 사이의 공백이 생기면 그 사이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한 기분을 어찌 모르겠는가. 내가 여행에서 그 마음을 절절하게 알기 때문에 쉽게 단언해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 또한 여행이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등등의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에 박명수 씨의 유튜브를 보았다.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는 청년이 나왔다. 전공이 적성과 맞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박명수는 이런 조언을 내밀었다. 일을 하면서 겪어보아라! 여행에서 오는 경험 또한 너무 좋지만 일에서 느끼는 경험이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맞는 말이었다. 대체 여행에서는 뭘 알 수 있을까? 여행에서 알 수 있는 경험도 분명히 있다. 내 경우의 이야기를 나열해 보겠다.


1.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얼기설기 짜놓은 일정이지만 그날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지낼 때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2. 동행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나만의 길을 하면 그뿐이다.


여행에서 정말 많은 동행들을 만났다. 인터넷에서 구해보기도 했고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연을 이어간 경우도 있었다. 모든 동행들이 좋지는 않았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일정 중간에 서로 웃으며 안녕을 하기도 했다. 관계의 맺고 끊음에 어려움이 있던 나는 여행에서 관계를 정립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3.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나뿐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적이 있었다. 여행 극초반이었는데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당장 연락을 할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 나를 지켜야 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손짓 발짓을 해야 가면서 결국 내가 나를 구해냈다. 귀하의 독립심과 문제해결 능력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4. 내가 나를 아프지 않게 보살피고 먹여 준다.


한 이틀 머물다 집에 가는 것이 아닌데 아프면 안 되지! 어떻게 해서든 절대 아프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나를 돌보았다. 몸이 서늘하다 싶으면 감기약과 따듯한 걸 찾아서 먹여 주었다. 내가 나를 챙겨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웠다. 


이런 것들은 여행을 통해서 바짝! 단기 속성으로 배우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히고 도시의 역사나 지식을 쌓은 것 역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나를 다하는 태도, 앞으로 지녀야 할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일해서 다시 와야지! 하는 마음속의 다짐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만들어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내가 돌아갈 자리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아서 바로 여행이 끝난 뒤 거의 바로 취업을 하고 이후에 여행을 인생의 원료 삼아서 추억팔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일 뿐이다. 지금도 여행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무어라 뾰족하게 답하긴 어렵다. 장기여행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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