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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앤라라 Apr 18. 2022

이별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나를 이해해볼 마음은 없는 거야?

나를 사랑하긴 했니?

우리의 이별에도 비슷한 말들이 오갔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느냐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 알기는 하냐며 책망하듯 무거운 감정을 쏟아냈다. 사랑에 온 정성을 기울이기엔  내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나는 삶이 버거워서 사랑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고 하소연했다.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관심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아느냐고 반문했다.


한 사람은 삶이 버거워서, 한 사람은 사랑이 버거워서 결국 두 사람은 끝을 향해 간다.

서로를 비난하고 그 비난의 칼끝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나서야 끝이 난다.

어차피 끝날 걸 알면서도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감정을 쏟아내야 돌아설 수 있다.

이별을 고하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결국 똑같이 힘든 시간이다.


이별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별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매번 헛발을 내딛듯 허공을 가르는 기분이다.

어렸고,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고, 그게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착각했다.

변해버린 마음을 설명하고, 우리가 더는 함께할 수 없지만 그 시절 그때에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나쁜 말들을 쏟아내고, 그만큼 오래 아팠다.

그 후회 속에서 돌아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성숙하지 못한 이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픈 이별은 서로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여지를 주지 않으니까.


누군가와 '좋은 이별'에 대해 논할 때면 이별이 어떻게 좋을 수 있느냐고,

두 사람이 동시에 감정이 식어서 헤어져도 좋은 이별이란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듯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밑바닥까지 보여주고, 후회할 걸 알지만 막말을 뱉은 후에야 끝이 나는 게 이별이다.

먼 훗날 자신의 치기어림을 후회하지만, 그래서 이별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마지막 회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이별 장면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말들로 얼룩져 있어서 좋았다.

그게 현실의 이별이니까.

나 또한 그렇게 어리석은 이별을 경험했고, 그래서 돌아갈 수 없었고, 지금은 그때 그 이별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기적같은 만남과 말도 안 되게 현실적인 이별.

이별의 순간에 후회가 남는 건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보다 나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다.

그러니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너무 아픈 말은 뱉지 말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이별을 다시 쓰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이별이 그래서는 안됐다는 말", 나도 가끔 떠올려 보는 말이다.


나는 너와의 이별 장면을 다시 쓴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너는 내가 웃는 게 예쁘다는 걸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다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네가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고.

지금처럼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네 덕분이라고.

영원을 약속하지 않고, 오랜 사랑을 약속했으니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킨 셈이라고.

홀로 서지 못해 늘 휘청였던 내 삶이지만 가장 눈부셨던 젊음에

네가 함께여서 숨가쁘게 설렜고 참 좋았다고.

너라서 참 좋았다는 말,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많이 고마웠다는 말까지. 


나는 이렇게 우리의 이별 장면을 다시 써본다.


이별이 지나간 자리에 아픈 상처만 남는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사랑했던 마음도 그 자리를 지킨다.

언제 떠올려도 좋을 수 있도록.

미화된 과거라고 해도 우리는 지난 시간만큼은 기억하고 싶은대로 추억할 권리가 있다.

그 시절 그때의 추억은 온전히 우리 것이니까.

그러니 너무 아픈 이별이 후회가 된다면 이번 기회에 이별을 다시 써보면 어떨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건, 다시 쓴 이별 장면이 위안이 됐기 때문이다.  

때로는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좋을 때가 있다.

이별이 꼭 세드엔딩은 아니라는 걸, 세상을 더 살아보니 알겠다.

그러니 그대, 너무 오래 아파하지는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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