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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앤라라 Oct 14. 2021

이별하기 좋은 날

마음의 자리_이별을 준비하는 당신에게

“결국 사랑은 타이밍이다. 내가 승희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 보다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게 운명이고 사랑인 거다.”

-영화 <너의 결혼식> 중에서


2012년 <건축학개론>이 개봉했을 때도, 2018년 <너의 결혼식>이 개봉했을 때도 사람들은 첫사랑을 떠올렸다. 조금 서툴었고, 자꾸 어긋났고, 결국 오해했고,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던 첫사랑을 누구나 가슴에 품고 산다. 당시 나는 <건축학개론>을 같이 봤던 남자친구와 10년째 연애 중이었고, 6년 후 <너의 결혼식>을 같이 본 남편은 그가 아니다. 



H와 나는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서 ‘첫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이렇다하게 떠올릴 첫사랑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H와 헤어지면 이런 영화를 볼 때 아마도 H를 추억하게 될 거라고 했던 농담은 현실이 됐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그때 그 말에 절반쯤은 진심이 녹아 있었던 거다. 

11년을 만나고 헤어진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면 하나같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연애할 수 있었냐고, 지겹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긴 연애의 이유를 “우유부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말 또한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사랑했다거나 ‘너무’ 애달픈 연애였다면 그렇게 길게 지속하지는 못했을 거다. 금방 싫증을 내지 않는 성격과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성향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데일 정도로 뜨겁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크다. 늘 팍팍했던 삶 속에서 안정적이라는 건 연애를 지속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사실 만남과 헤어짐 모두 결국은 타이밍의 문제인데, 그 타이밍이 어긋난 순간이 이별의 순간이다. H와 내가 왜 헤어졌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헤어짐을 말하며 둘 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것과 커피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너무 떨려서 꼭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 정도가 기억 속에 남아있다. 고시공부를 했던 그가 여자친구가 근무하는 회사 앞에 찾아오기 위해 아끼던 셔츠를 꺼내 입었고, 지나칠 정도로 깔끔했던 그가 허리춤에서 삐죽 삐져나온 셔츠 자락을 구겨 넣지도 못한 채 걸어가던 뒷모습이 가끔 떠오를 뿐이다.  


감기처럼 앓고 지나가야 비로소 풍경이 된단다

그곳에서 니가 걸어 나올 수가 있단다

시간의 힘을 빌리고 나면 

사랑한 날의, 이별한 날의 풍경만 떠오르겠지

사람은 그립지 않고

그 날의 하늘과 그 날의 공기, 그 날의 꽃 향기만

니 가슴에 남을거야

그러니 사랑한 만큼 남김 없이 아파해라

그게 사랑에 대한 예의란다

비겁하게 피하지 마라

사랑했음에 변명을 만들지 마라

그냥 한 시절이 가고, 너는 또 한 시절을 맞을 뿐


-서영아 <딸에게 미리 쓰는 실연에 대처하는 방식> 중에서 




감정에도 끝이 있다는 걸 그와 헤어짐을 결심하면서 알게 됐다. 이미 우리의 계절은 끝이 났는데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미 끝난 계절을 부여잡으면 마음만 한없이 춥고 외로워질 뿐이다.

기억이 왜곡됐겠지만, 헤어짐을 고하고 난 후의 일상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고 덤덤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혼자가 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이별’이라는 것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10년 이상 지속한다는 건 그 자체가 당연한 일상이 되는 거니까.

이별한 지 3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내가 길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했던 누군가를 잃었지만 내 삶은 그저 평범하게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뒤늦게 길을 잃고 휘청거렸다. 많이 아팠고 일상이 무너졌고 오래 길을 헤맸다. 누군가를 온전히 잊기까지는 만났던 기간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 기준으로 보면 나는 여전히 상처 속에 있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H도 나도 그렇지 않다는 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누굴 만나든 그때 그 사람은 아니니까. 심지어 그 사람과 재회한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의 그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 시간의 기억을 너무 오래 부여잡은 채 현재의 나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어제의 사랑은 어제의 사랑으로 남겨두는 것이 추억을 더 아름답게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생생했던 기억들조차 흐릿해지고 어렴풋한 기억만 남는다. 잊혀진다는 건 그래서 축복이다. H와 헤어졌던 그 계절이 오면 여전히 H를 떠올리지만, 더는 미안함에 눈물짓지는 않는다. 그렇게 함께했던 시간은 추억이 되고 추억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스물 두 살에도, 서른 두 살에도 H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너의 결혼식>을 보면서 나는 약속대로 H를 떠올렸다. 긴 인생 그래도 가슴 시리게 추억할 누군가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그만 H를 놓아줘도 될 것 같다.  


널 만난 거 후회했다는 말 사실은 그 반대야. 나 요즘 되게 행복해. 애들 가르치는 것도 너무 즐겁고 그게 다 네 덕이야. 네가 있어 줘서 이 새로운 꿈도 생겼고 대학도 가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선생님도 되고. 네가 옆에 있어줘서 이렇게 바뀐 거야. 대책 없이 살 뻔한 놈 네가 사람 만들어 준거야. 내 인생에 불쑥 나타나줘서 고맙다.
-영화 <너의 결혼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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