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시집, <오십 미터>
시인은 강을 보며 시를 쓴다. 혹은 강을 보며 생에 대해 깨닫는다. <오십 미터>에는 강이 주요한 메타포로 등장한다. 시인에게 강은 무심하지만 아름답고 자연스럽지만 잔인하다.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시간을 닮았고,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점에서는 삶을 닮았고, 한 번 만난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끝난 사랑을 닮았다. 시인은 “사람의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강물의 일’)"고 말한다. 시인에게 강물은 “몸을 던지는 곳”이자 “떠오르는 곳”, “몇 달도 못 갈 사랑을 읊조리는” 곳이자 “마음의 짐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는 곳이다.
"강물은 어떤 것과도 몸을 섞지만 어떤 것에도 지분을 주지 않는다. 고백을 듣는 대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강물의 그 일은 오늘도 계속된다. 강물은 상처가 많아서 아름답고, 또 강물은 고질적으로 무심해서 아름답다. 강물은 여전히 여름날 이 도시의 대세다.(’강물의 일')”
시집 전체를 끌고 나가는 정서는 처연함이다. 화자는 지나간 사랑을 자주 떠올리고,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지만 그것들은 아름답거나 빛나기보다는 남루하고 상처로 가득하다. 김소연 시인은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처참함은 너덜너덜해진 남루함이며, 처절함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괴로움이며, 처연함은 그 두 가지를 받아들이고 승인했을 때의 상태다(김소연, <마음사전>)”. 김 시인의 정의를 빌려온다면, 시집 속 화자들은 처참함과 처절함이 모두 지나가고 난 뒤, 처연한 마음으로 발화한다. 그들은 그리워하고, 괴로워하며, 종종 후회한다. ”생을 주고 얻은 것은 종유석처럼 자라나는 그리움일 뿐(’참회록 그 후’)”이라면서도 “무슨 수로 그 그리움을 털겠(’오십 미터’)"느냐며, “너의 슬픔을 가져오지 못한(’천호동')" 것에 대해 오래 아파한다.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 게 많은 사람(’제의')”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사람은 바로 시인 자신일 것이다. 많은 것에 마음을 주었고 오롯이 생을 바쳤기에 잃어버린 것도 많았던, 그리하여 그 모든 괴로움이 지나간 뒤에 처연한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사람일 것이다. 자주 괴로워하고 자주 슬퍼하는 사람. 생에 대한 비참을 연료로, 실패한 사랑을 무기로 펜을 드는 사람. 어쩌면 시인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 스테레오 타입과 가장 닮아 있는지도, 그래서 유독 많은 사랑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허연은 ‘죽음'을 다시 쓰면서, 인간의 생이 안기는 허무를 치열한 평안으로 전환해낸다. 우리가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때때로 슬픔에 굴복하고 마는 순간을 맞이할 지라도, 그것은 단지 생의 일부로서의 죽음을 시다리다 보면 필히 거칠 수밖에 없는 삶의 형식 중 한 가지라고. 그러니 모든 것은 지나가는 중에 있는 것이라고, 시인은 초연하게 슬픔을 공유하며 일러주는 것이다. (양경연, 작품 해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