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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Apr 28. 2024

피할 수 없었던 이민 우울증

사람이 매일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도 이유 없이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기분 좋은 날이 있고, 그 어떤 재미있는 유머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할 정도로 많이 쳐지는 날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쳐지는 날이 아주 많지는 않고, 아무리 오래가도 하루를 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상했다. 


기운도 없고 뭘 해도 즐겁거나 흥미롭지 않았다. 집에서도 축 처진 어깨로 걸어 다니고, 남편에게 늘 하던 장난도 안 치게 되었다. 기운이 없으니 자꾸 눕게 되었고, 졸리지 않더라도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잠을 잤지만, 자고 일어나도 발 밑으로 내려간 기분은 도무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창 밖의 맑은 날씨를 보면 날이 너무 좋다며 신이 났는데, 달라진 나는 똑같이 맑은 날씨를 보고도 더위와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저 집 안에서 멍하니 창 밖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이런 상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월경 전 호르몬이 요동칠 때는 이유 모를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리 월경 증후군이라고 해도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없던 증상이었다. 눈물이 줄줄 날 때는 너무나 외롭고 세상에 나 혼자 고립된 것 같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어딘가를 가야겠다, 뭐라도 좀 해야겠다 싶다가도 내가 여기서 갈 곳이 없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만날 사람도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차 없이는 집 밖을 나설 수 조차 없는 미국 시골에서, 운전 경력이 많지 않은 나에게 목적지 없이 그냥 운전을 한다는 건 오히려 긴장되는 일이다. 때문에 ‘드라이브’라는 걸 즐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운전을 좀 한다 싶어도 이 동네에 갈만한 곳 자체가 별로 없으며, 그래도 재미있을 만한 곳을 찾아봐도 한두 시간은 내리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한국에서는 밖으로 나가 맛있는 걸 사 먹고 친구들과의 수다로 우울을 떨쳐 냈었는데,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는 데다 초보 운전자니, 그저 팔다리가 잘린 채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라 눈물만 나왔다. 


아이러니 한 건 내 이런 기분을 남편이 알아줬으면 싶다가도, 이런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물이 줄줄 날 때면 좁은 옷장에 들어가 앉아 불도 안 켜고 눈물을 훔치면서, 남편이 우연히 우는 나를 발견해 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마음과 싸웠다. 물론 24시간 한 집에 붙어 있는 사람이 내 상태를 완전히 모를 리 없었지만, 막상 얘기를 하려 해도 내 우울의 이유는 당장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더더욱 혼자 다스리려고 애썼다. 그러다 내가 이 삼 일을 내리 울기만 하고 무력감에 누워만 있자, 남편도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 생활 적응이 너무 어려운 것 같다고 말이다. 스스로 적응력이 그렇게 뒤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새로운 사람과 도시에 한정된 것이었지, 타국의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 적응해야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남편도 멍하니 벽을 보며 울고만 있는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미국에 집을 산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다시 이사를 갈 자금도 충분하지 않았고, 이사를 간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둘 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조금 더 도회지 쪽으로 이사를 가볼까 하면, 미국에서 도시라 할 만한 곳들은 집 값과 물가가 너무 비싼 데다 치안 문제가 있었고, 물가와 치안이 괜찮은 곳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동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무조건 도시 쪽으로 이사를 간다고 해서 내 상태가 완전히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내 마음의 문제라 여기고 나아지려고 애썼지만 똑같은 환경에서 혼자 달라지려고 몸부림쳐봤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약 네다섯 달가량을 우울과 싸우며 보냈다. 전문가와 상담도 고려를 안 해본 것은 아니나, 말도 안 되는 미국 병원비에 쉽게 병원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한국 땅에 내리자마자 그 우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국에 머무는 내내 아주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혼자 벽 보고 우는 일은 사라졌으니 말이다. 미국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우울의 폭풍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는데, 물론 여전히 우울감이 찾아올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전처럼 극심하게 기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다행인 건 다양한 한국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미국 온라인 사이트를 찾았다는 것이다. 가격 때문에 자주 시키지는 못 해도 한국 마트까지 두 시간 반은 가야 하는 이곳에서 택배로 곱창전골을 받아볼 수 있다는 건 나에게 문명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우울증의 팔 할은 향수병에서 왔나 보다. 


지금은 미국 시골 생활에 적응했다는 건 아니다. 전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찾았지만 여전히 나는 이사를 생각하고 있다. 직장, 집, 돈 문제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내가 뭘 힘들어하고 뭐가 안 되는지 알게 된 이상, 괜히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정신 다 갉아먹지 말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좀 더 나은 방법을 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러면 그 우울이 언제 나를 다시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미국에 온 걸 후회하지도 않고 지금의 이 동네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나와 남편이 더 만족할 만한 환경은 계속 찾아볼 예정이다. 뭐, 삶은 나에 대해 더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그 여정에 최선을 다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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