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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Jul 24. 2024

낯선 사람이 건네준 신용카드

얼마 전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간절히 보고 싶었던 콘서트가 뉴욕에서 열려, 콘서트를 보러 가는 김에 뉴욕 여행을 여름휴가로 치기로 했다. 시골에 살다 보니 도시로 가는 여행이 일종의 휴가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같은 미국 안에서 움직여도 비행 편이 많지 않은 시골 공항에서 직항으로 갈 수 있는 지역은 별로 없다. 그래서 좀 알려진 대도시로 떠나려다 보면 늘 환승을 한 번씩 해야 하는 통에, 한국에서 동남아 가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쓰기도 한다. 게다가 말 많고 탈 많은 미국 항공사들은 제시간에 떠나는 비행기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연착이 많아, 잘못 걸리면 어디 해외 가는 것도 아닌데 공항에 갇혀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이번에도 그랬다. 


뉴욕에 가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때 문제가 생겼다. 나와 남편은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럿 공항으로 가, 그곳에서 환승을 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제시간에 도착하면 샬럿 공항에서 다음 비행까지 약 두 시간 정도 여유 시간이 있는 터라 간식까지 챙겨 먹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비행부터 탑승이 한 시간 정도 지연되더니, 탑승을 전부 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 비행기가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앞에 대기 중인 비행기가 많다는 이유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이번에는 비행기에 기름이 떨어졌다며 다시 터미널로 가 한 시간을 더 썼다. 도합 세 시간 늦게 샬럿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 비행기는 늦게 도착하는 우리를 버리고 먼저 떠나버렸다. 


다음 비행 편으로 바꾸기 위해 샬럿 공항에 내리자마자 항공사 안내 데스크로 달려갔고, 거기서 전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 있는 긴 대기줄을 맞닥뜨렸다. 항공권 상담 하나만을 위해 기약없이 공항 줄에서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부터 당장 일을 해야 했기에, 남편과 나는 어떻게든 오늘 안에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해야만 했다. 그래서 넓고 넓은 샬럿 공항을 뒤져 다른 터미널에서 같은 항공사 안내 데스크를 찾아냈다. 그곳에도 대기줄은 있었지만, 본래 내가 있던 터미널 대기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줄이었다.

 

그렇게 터미널을 오가며 발로 뛰어 다행히 오늘 내에 탈 수 있는 마지막 비행기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제야 몇 시간째 아무것도 못 먹은 게 떠오르며 배가 미친 듯이 고파왔다. 공항 내에는 다양한 식당들이 있었지만 전부 만석으로, 주문 한 번 하면 최소 20분 이상 기다리라는 말이 나왔다. 뱃가죽이 쪼그라든 탓에 그만큼 기다릴 수 없던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버거킹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항 내에서 제일 인기 없는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치고 카드를 꽂았는데 결제가 되질 않았다. 대신 결제가 거부되었다는 문장이 스크린에 떴다. 분명 카드에 돈이 있는데…. 이상하다 여기며 주문 취소를 하려는 찰나, 내가 카드를 정지시켰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한국 기반 해외 결제 전용 카드를 쓰고 있었는데, 최근 출처를 알 수 없는 금액이 결제되려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카드 안에 있던 돈은 결제 금액에 못 미치는 금액이라 결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카드 번호가 노출되었고 누군가 내 카드를 온라인 결제에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아, 카드 사용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카드 어플로 사용 정지 설정을 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키오스크 주문이 취소되기 전에 사용정지를 풀기 위해 어플을 열었다. 그러자 뒤에서 모르는 남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직원도 아니고 내 뒤에 서 있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어디서 나를 보고 있다가 훌쩍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내가 햄버거 결제해 줄까?”라는 말을 했다. 당황스러웠다. 


보통 뉴욕에서 무언가 결제하고 있는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대부분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었지, 돈을 준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들었는데도 다시 한번 물어본 건 그때문이었다. 현금을 구걸하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 오히려 돈을 준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그냥 내 카드를 써도 된다며 내게 본인 카드를 내밀고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키오스크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비행기표 조정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닌 터라 머리는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얼굴은 땀 때문에 얼룩덜룩한 사람이 보였다. 겉모습이 이러하다고 다 어려운 사람들인 것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노숙자 많은 뉴욕에서 어지러운 모양새로 햄버거 하나 결제 못 해 허둥지둥하는 키 작은 동양 여자애가 왠지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서둘러 어플로 카드 정지를 풀고 내 카드로 결제를 했다. 그리고 카드 주인에게 다가가 카드를 돌려줬다. 카드 정지 시킨 걸 잊었다고 아까의 내 상황을 설명했고, 그는 내가 확실히 주문을 완료한 것인지 물어본 후 카드를 돌려받았다. 돈이 없는데 자존심 때문에 카드를 돌려주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본 그는 중년의 아저씨로, 다른 의도 없이 정말 순수하게 배고파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 햄버거 하나 정도 베풀어 주고 싶었던 사람인 것 같았다. 미국에서 이런 류의 친절은 처음 받아봐서 진심으로 감동하기도 했고 버거 하나 못 살 것처럼 보이는 내 몰골이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여러 식당을 둘러보다 마지막에 온 나와 달리, 처음부터 버거킹으로 와서 일찍이 자리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던 남편은 이 상황을 몰랐다. 내가 그에게 가 이런 친절을 받았다고 설명하자, 남편도 버거킹을 떠나기 전 그에게 다가가 고맙다는 말을 인사를 건넸다.


살면서 가끔 이런 뜻밖의 호의를 받을 때가 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그런 말을 건네기까지 생각보다 용기와 행동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실제로 그가 내게 밥을 산 게 아닌데도 이미 두 번 세 번 밥을 얻어먹은 것 같은 만족감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살면서 본인 같이 따뜻한 사람만 만나길 바란다고 조용히 축복을 빌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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