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들어간 돈카츠집에서
바쁘단 말이 민망할 정도로 일이 미쳐 돌아가는 요즘, 겨우겨우 짬을 내 친구를 납치해 자주 가던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치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만석이라니. 그래도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웬걸, 8시 30분까지 예약이 찼단다. 꽤나 명망이 높은 인스타 맛집 계정에 소개가 되었다고 한다.
실의에 가득 차 에너지를 잃어버린 나를 친구가 리드했다. 저기 길 건너 있는, 누가 봐도 새로 생긴 것 같은 깨끗한 집에 들어가서 적당히 먹자고.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채로 끌려 들어가니 웬걸, 맛집 레이더가 미친듯이 울린다. 돈카츠집인데 키오스크가 있었거든. 종류를 불문하고 일식 장르에서 키오스크는 상징이다. 신뢰의 상징, 자신감의 상징, 현지의 맛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색깔이 알록달록하고 레이아웃이 거지같으며 배경이 누리끼리하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두어개는 이미 품절이다. 홀린 듯 안심카츠를 주문하고 다리를 달달 떨면서 기다리자 금세 음식이 나온다. 레이더는 이제 울리다 못해 발광을 하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입. 헛웃음이 터진다. 돼지 안심에서 치즈 맛이 난다. 최고급 덩어리 모짜렐라 치즈를 그을리지도 않고 아주 살짝만 구워 씹는 것 같다. 고기를 먹고 있는데 고기 맛이 거의 안 난다고 생각할 때 쯤 돼지 잡내가 아닌 진한 육향에 마지막에 치고 올라온다. 세상에. 돈카츠 세계엔 아직도 이런 숨은 고수들이 남아있던가. 이쯤 되면 비밀 무공처럼 전승되는 돈카츠류 비기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옆을 쳐다보니 얼씨구, 얜 아예 눈을 감았다. 말 없이 안심을 하나 집어 건네주고 특등심을 한 조각 가져왔다. 아, 왜 세상은 돈카츠를 낳고 등심 안심 반반을 낳지 않았던가. 진하다. 식감이 단단한데 부드럽다. 최상의 고기를 최상의 방식으로 튀겼다. 말없이 각자 식사를 마쳤다.
서울은 참 기묘한 곳이다. 아마 도시마다 맛집 점수를 정량적으로 매길 수가 있다면 탑3안에는 너끈히 들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나라의 요리가 다 있는데, 어지간한 현지보다 더 나은 맛을 내기도 한다. 맛집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몰리는데, 그만큼 신생 맛집도 미친 듯이 생겨난다. 그런가 하면 가장 핫한 동네에 생긴 핫한 맛집도 일순간 유리벽에 '임대' 글자만을 남기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다.
한 마디로 맛에 엄청나게 진심인 도시라는 소리다. 요즘 유독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걸 쏟아부어도 행복 한 조각이 불확실한 요즘, 돈과 약간의 시간만으로 얻을 수 있는 단단한 행복이기 때문일까. 서울에 대한 애정이 찬찬히 숙성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