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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맹 Jan 04. 2024

칼잡이 남편

요리의 절반은 칼질이렸다

전직 칼잡이라 해도 아무도 의심치 않을 우리 집 아저씨. 워낙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의 반 타의 반 은퇴로 지난 일 년 집에서 놀면서 요리 실력이 날로 달로 비장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아~~~ 터져 나오는 한숨).


오늘의 메뉴는 린젠 (Linsen) 수프. 내 요리못알이라 재료 이름도 한국어로 잘 몰라 (한국어로도 모르고, 영어로도 모르고, 독일어로도 모르고…오랜 해외살이에 갱년기까지 겹쳐 이 사단이 남들보다 빨리 왔다) 찾아보니 렌틸콩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렌즈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 콩은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 때부터 주요 식량이었는데,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도 재배되어 이 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한국에 살 때 렌틸콩을 (알고) 먹어본 적이 없고 독일에 와서 이 콩요리를 일상식으로 접하게 되다 보니 마치 이 콩이 독일에만 있는 줄 홀로 착각하고 살았다. 유럽에서는 남부 지역 스페인으로부터 지중해 연안을 따라 대서양 해안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고 독일에서는 린젠아인토프 (Linseneintopf)라 불리며 영양 풍부한 한 그릇 음식으로 날씨가 찌뿌둥한 겨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다.


20분만 끓이면 되고, 단백질이 풍부한 데다 겁나게 맛있기까지 한데도 집에서는 잘해 먹지 않게 되는데 중대한 이유는 속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들을 다 찹찹찹 칼질해야 되기 때문이다. 재료라 함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 있겠으나 보통 당근, 감자, 양파, 셀러리악(뿌리), 돼지 뱃살 등인데 이 중 당근과 셀러리 뿌리를 깍둑썰기하다 보면 갱년기 아줌마의 손모가지를 수프 앞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 나는 나보다 훨씬 덩치 크고 튼튼한 가족들의 건강에 손목을 바칠 만큼 헌신적인 엄마가 아니기에 사놓은 렌틸콩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마지막 주 (그러니까 며칠 전) 팬트리를 정리하면서 유통기간을 껄떡 껄떡 넘겨가는 렌틸콩 봉지를 발견했다. 사라져 가는 나의 근육들에게 단백질의 근원을 선사하기 위해 구입해 놓고 찹찹찹을 해낼 자신이 없어서 오늘날까지 모셔둔 렌틸콩들을. 그리곤 남편에게 애원했다. 린젠수프를 대령해 내시오.


(울먹이며) 집에서 노는 남편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좋다. 허기짐과 지침으로 에너지가 박살 나 지쳐 쓰러지기 전 퇴근해서 들어오면 식탁에 따뜻한 한 끼가 준비되어 있다. 고마운데, 너어무 고마운데, 나가서 벌면 나보다 다섯 배는 많게 벌어올 수 있는 남편이 신나서 차려주는 밥을 앉아서 기쁘게 받아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한참 걸렸다. 혹시나 이 생활이 길어질까? 아니지 '몇 번 차려주고는 곧 생활전선으로 나가겠지'에서 몇 개월이 흐르고, '냉장고에서 남은 음식을 꺼내먹고 살아갈 터이니 제발 나가서 좀 벌어다주지'가 몇 개월, 그리고는 포기했다. 그냥 내가 많~~~ 이 버는데 비~~~ 싼 요리사를 고용해서 같이 사는 거라고 상상하자! 독일에도 열녀상이 있으면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쥐꼬리만큼 밖에 못 벌고, 퇴근해서는 집에서 대차게 놀면서 즐겁게 살림하고 있는 남편의 눈치를 보아가며, 그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이 K여인에게 반드시 수여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닌가? 어찌 보면 내가 지난 1년 아랫입술에만 풀칠할 정도로 벌며 고용불안에 떨어가며 살면서도 요리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매끼를 잘 얻어먹어서 그나마 건강에 무리 없이 잘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신이여 들리시나이까?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 발악하는 반백살 아줌마의 외침이?)

칼질하는 것이 명상하는 효과가 있다는 우리 집 아저씨는 커다란 요리칼을 들고 모든 재료를 또각또각 단아하게 잘랐다. 내게 칼질은 강력한 스트레스 유발행위로 나는 무엇을 잘라도 같은 크기로 잘라지지가 않는다. 성격 급하고 반복작업이 너무나도 힘든 나는 요리를 하려 해도 '썰기'가 넘지 못할 장애물이다. 반복작업 없이 숙련되는 일이 무엇이 있으랴? 이 때문에 나는 요리뿐 아니라 시간을 요구하고 듬직하게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을 내 인생 리스트에서 속절없이 발라내야 했다. 반복작업의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배움은 거의 없기에 오늘날까지도 차근차근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힘들다. 

어찌 되었든 깍둑썰기가 다 끝난 각각의 재료들은 대형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20분을 끓인 후에 고소한 린젠수프로 탄생되었다. 고깃국의 고소함과 퍼지지 않은 린젠콩의 부드러우면서도 오독거리는 식감, 뭉근하지만 재료의 질감이 살아 있는 셀러리 뿌리와 당근, 감자까지... 너무 맛있는 식사가 되었다! 그래, 나는 은퇴한 요리사랑 사는 것이다 (배가 부르면 급속도로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음~~~ 린젠수프 두 그릇 뚝딱 해치우고 살 속에 꼭꼭 숨은 온몸의 근육에 단백질을 팽팽하게 공급했으니 다시 허리를 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일을 해내고 마음이 허할 때마다 하루에 한 시간 블로그에 글 쓰고 돈 벌기 이런 사이트를 눈팅할지어다. 인생 뭐 있나?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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