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맹 Aug 15. 2024

샤론스톤이 진행한 독일의 반상회

첫 경험

난 평생 반상회를 가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아파트에 살아 본 적이 있으나 그때 기억은 없고 십 대 때는 주택에서 살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로는 주택을 소유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고 미국에서고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 번도 반상회 비슷한 모임을 참가해 보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결혼 후 독일로 와 가정을 꾸리며 첫 다섯 해 동안은 월세를 살았다. 아이 둘을 낳고 둘째가 네 살이 되었을 때서야 집을 사게 되었는데 은행 빚을 왕창 져서 샀기에 우리는 은행소유집에 얹혀 산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집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반상회를 나가게 되었다.


일 년에 서너 번 열리는 반상회는 늘 남편의 몫이다. 독일어가 어설퍼서 내가 못 가기도 하지만 우리 동네 반상회는 남편에게 들어보면 거의 법정 재판이다. 우리 아파트(그래 봤자 5층 건물이다)에 변호사 두 분이 사는데 그중 한 분이 주민대표로 건물 관리하는 사람들이랑 소통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회의에 반영한다. 매번 반상회가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반상회에서 토론되어야 할 주제를 모으고, 문제를 명확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정해서 어젠다를 작성한다. 그리고 반상회 2주 전에 어젠다가 메일로 날아와서 금번 반상회에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고, 그 문제의 해결의 옵션은 무엇이고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제시된다.

늘 그렇듯이 이번 반상회도 목요일 오후 5시에 개최되었다. 금요일 오후는 다들 개인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목요일 오후가 항상 반상회 타임이고 직장인들도 이 시간은 맞추기 어렵지 않기에 빠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현재 남편이 멀리서 근무하고 주말부부다 보니 이번 반상회에는 내가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 이 아파트에 산지 10여 년이 지난 시간에, 처음으로. 약간 어색했지만 다행히 옆집 남편도 출장 중이라 그의 전 부인이면서 나와 친한 프랑스여인과 함께 가게 되었다. 반상회에 참여하기 불편해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가지 않아도 좋고, 혹 가게 되면 프랑스 언니가 하는 데로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며 나를 달랬다. 만약 반상회 참여를 하지 않게 되면 원하는 이웃에게 선거를 양도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위임장에 싸인을 해서 미리 제출해야 하고 권리를 양도받은 이웃이 매 안건마다 두 표를 행사한다.


안 가고 프랑스 언니에게 표를 양도할까 하다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가기로 결심했다. 안건은 이미 뻔하기 때문에 가서 투표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살짝 긴장했다. 또한 모든 이웃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라 기대가 되기도 했다. 반상회는 우리 건물 내에 사는 모든 이웃들이 오는데 건물에는 수 개의 현관이 있어서 같은 현관에 사는 이웃이 아니면 얼굴은 알지만 인사를 안 하고 지내는 이웃들도 있다. 반상회에 참여하면 서로의 이름도 잘 알게 되고 안면식도 생기니 이래 저래 만나면서 말 섞는 이웃도 늘어나게 될 터이고 친목 도모를 위해서도 안 갈 이유가 없었다.

4시 55분 집을 나서서 집 앞의 서비스 센터 건물로 향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집에 살고 있던 프랑스여인이 자전거를 길에 주차하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반상회가 열리는 센터 1층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서 출석을 체크하고 투표를 할 수 있는 작은 리모컨을 받았다. 리모컨에는 내 이름이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찬성을 하는지 반대를 하는지 모두가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민들이 이미 다 와서 착석해 있었다. 은퇴한 어르신 분들은 20분 전부터 대기하고 계시기도 하다.


오늘의 진행은 아파트 서비스 센터직원이 했는데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금발의 미녀였다. 40대로 보이는 그녀가 특히 멋졌던 것은 멋진 중저음 목소리를 가지고 미니스커트에 정장 웃옷을 걸치고 카리스마를 여러 방면으로 뿜었다. 날이 무척 더워서 나는 거의 반바지 반팔에 집에서 놀던 차림으로 갔는데 진행자라서 그런가 뉴스 앵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가 더 프로페셔널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착석해서 놀라운 진행 솜씨를 보였다. 반상회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았던 나는 주변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처음 5분은 센터 직원의 미모와 포스에 반해서 그녀를 관찰하느라 시간이 그냥 지났다. 앞에서 셋째 줄 가운데 앉았는데 그녀가 착석하자 짧은 미니스커트가 살짝 더 위로 올라가 아찔한 광경이 벌어졌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책상 밑에 멋지게 뻐드러진 아름다운 다리와 치마 속을 보지 않았다. 나만 과거의 basic instinct영화의 샤론 스톤을 연상하며 반상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금발의 미인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아름다운 얼굴을 피지 못하고 특유의 독일인의 표정인 집중으로 양미간이 찌그러진 모습으로 당차게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텔레비전에서 본 키 크고 예쁜 금발미인들의 섹스어필과는 완전 거리가 먼 프로답고 당찬 그녀가 점점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 정신 팔고 있는 동안 주민들은 파워포인트를 보며 열심히 반상회에 임했다. 매 안건은 파워포인트에 다 담겨 있었고 각각의 안건이 마무리되는 방식은 늘 투표다. 입장할 때 나누어준 투표를 위한 리모컨으로 동의, 반대, 혹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음의 버튼을 누르는데 그러면 스크린에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 나오면서 그 아래 몇 퍼센트의 찬성과 반대인지 집계가 된다. 매번 질문이 나왔고 그때마다 아파트를 대표하는 변호사 양반이 일어나 사안의 자세한 배경이나 법적인 내용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날의 안건중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비둘기의 피해가 큰 집들이 속속들이 나옴 - 건의자: ㅇㅇㅇ 박사. 자신의 발코니에서 찍은 비둘기 똥 사진과 아파트 기둥이나 지붕 등에 비둘기 피해 사진을 속속들이 올려 발표하고 건너편 집의 사람들이 비둘기에게 먹이를 줘서 사건이 악화되고 있음을 보고.

해결: 한 달에 한번 비둘기의 천적인 매를 오게 해서 (매를 키우는 단체가 있다) 비둘기를 쫒고 비용은 모두 나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해서 통과

2. 한 아파트의 현관문이 빡빡해서 잘 닫히지 않아 자동으로 닫히는 문으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 70만 원, 그 현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눠서 낸다 - 만장일치로 통과

3. 지하 주차장 CCTV 설치 - 주민 과반수 이상의 반대로 무산- 이것이 좀 문화충격이었는데 사생활이 중요한 독일 사람들에게 CCTV를 설치하는 것은 늘 반대가 많다. 참나... 한국서 어찌 살라고 ㅎㅎㅎ


그 외에도 10개의 안건이 더 있었는데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기술적인 내용이라) 우리 집에 직접 관계있는 일이 아니라 대충 다 찬성 버튼을 눌러서 넘겼다.


안건 처리가 모두 끝나니 1시간이 걸렸는데 그 후로 질의문답시간이 이루어졌고 토론을 좋아하는 독일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이야기 저이야기를 했다. 다들 시종일관 사뭇진지하게 경청하였고 샤론스톤언니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거나 하면 조절하면서 멋지게 미팅을 이끌었다. 나와 프랑스언니는 안건이 끝난 후 이어지는 토론이 너무 지겨워 가방을 다 싸서 이미 어깨에 걸치고 나갈 틈만 보고 있었지만 끝끝내 미리 나갈 수는 없었고 마침내 1시간 30분 후에 반상회가 막을 내렸다.


주민들은 센터에서 마련해 준 물을 한 병씩 손에 들고 반상회장 밖에 삼삼오오 모여서 관련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담소를 나눴다. 나와 프랑스 언니 역시 물한병을 원샷하고 헤어졌는데 빈 물병을 꼽으러 센터 안에 살짝 들어갔더니 샤론스톤언니가 파워포인트를 끄고 행사장 안을 혼자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매력에 지대로 콱 꽂힌 나는 오늘 회의 감사하다고 좋은 하루 되시라 큰 소리로 팬심을 드러냈다. 쿨하고 아름다운 그녀 역시 나에게 좋은 저녁이 되라고 화답했다.왠지 기분이 좋았다 (남편과 주말부부생활을해서 성정체성이 흔들리는 모양이다).


샤론스톤 언니와 반상회... 독일살이 20년에도 매번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게을렀던 나의 삶의 구석을 두드리면 항상 자아를 넓힐 수 있는데 나이들면서 새로운 일에 참여하거나 시도하는 것에 더뎌진다.


오늘 반상회 참여하기 싫어서 받았던 괜한 스트레스는 스스로 만든 허상이고 직접 참석해보니 사람과 문화와 서로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배운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나의 관찰센서가 다시 깨어난 것 같아 젊어진 느낌이다.


새로운 경험에 더 적극적이 되어야 젊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말에 클럽을 한번 가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