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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Apr 25. 2020

아무튼 마제소바는 정말 맛있다

“아마 이 책은 책에 쓰여 있는 생각을 전에 이미 했거나 적어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논고> 서문의 첫 문장이다. 저 문장에 책 대신 '글'이나 '말'을 집어 넣어도 의미는 통한다. 이 글은 글에 담긴 생각을 전에 이미 했거나 적어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논리란 설득이 아니라 설전을 위해 사용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논고를 쓴 비트겐슈타인처럼 논리를 위해 자기 시간을 할애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논리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게 살 수도 없고. 


보통 논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승부욕이 있는 사람들이다. 철학과 학생들이 그랬다. 물론 이 말에 근거 따윈 없다.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논리보다는 입 주변에 이목을 집중한다. 마찬가지로 그저 내 경험과 해석에 입각한 주장일 뿐이다. 그야말로 비논리적이다. 내가 논술과 거리가 먼 이유다. 아무튼 그 이후부터 지식을 설득력 대신 머릿속 빈 공간을 채우는 데에만 할애했다. 


때론 피곤한 아침 떠오르는 커피 한 잔처럼 설득력이 간절할 때가 있다. 내 기준에 몰상식한 사람이 어딘가에서 지극히 멀쩡하고 멀끔한 인상으로 누군가를 기만할 때 그렇다. 


세상은 지하철 칸을 닮았다. 이곳에서 소란을 부리던 승객이 다음 칸으로 이동해 아무 일 없는 듯 서있을 수 있다. 과정과 이면을 외면하고 결괏값이 모든 걸 말하는 시대에서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든 보며 살라고 외칠 이유는 없다. 불가지론에 가까운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 거고. 그런 거 잘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논리에 대한 갈증은 다시금 사그라들었다. 


합정 멘야하나비에서 먹은 마제소바의 영롱한 모습


최근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게 생기고 말았다. 마제소바다. 일본식 비빔면 같은 건데 진짜 맛있다. 모든 말에는 일정 부분 진리가 담겨있듯, 모든 사람에게서도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3만 원짜리 양장본 성경을 선물하며 교회에 나오라 말한 지인을 내심 귀찮아했지만 그 모습은 내게도 있었다. 내게 맛있는 걸 당신에게도 맛보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포기하고 살던 설득력이 절실해졌다. 


음식의 맛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황교익처럼 맛 칼럼니스트라는 명찰 달고 방송국 카메라에 얼굴 도장 몇 번 찍으면 될까. 아니면 제 발로 골목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백종원처럼 골목 하나를 내 걸로 만들어야 하나. “이 집 마제소바 증말 맛있쥬~” 구수한 말투까지 첨가해 차별화된 캐릭터를 만들어내면 금상첨화일 테지만 아쉽게도 내겐 백종원의 서글서글한 인상도, 황교익의 문장력도 없다. 


건넬 명함도 없지만 대신 꾸준함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마제소바를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두고는 그걸 지인들에게 전송했다. ‘이 집 정말 맛있다’는 말도 곁들여서. 그렇게 보낸 사진이 벌써 10장이 넘는다. 열 번도 넘게 먹으러 갔단 얘기다. 전략이 꽤 통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몇 명을 내가 좋아하는 마제소바 가게에 앉힐 수 있었다. 꾸준히 돈을 써 쿠폰 도장 모으듯 설득력을 얻은 셈이다. 


이런 얘길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게 손아람 작가다. 2년 전 강연장에서 만난 그는 그런 말을 했다. 어떤 호칭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볼 때 설득된다고. “난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인식론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볼 때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그런 얘기였다. 나도 몇 년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근거가 되는 삶을 살자"라고 말이다. 


사실 저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문제는 같은 얘기도 술에 취한 내가 뱉으면 그저 술주정이 되지만, 작가가 마이크를 잡고 청중을 향해 말을 하면 그럴듯한 얘기가 된다는 거다.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문장이 힘을 얻기도, 힘을 잃기도 한다. 논리라는 건 설득하는데 별 쓸모가 없다. 물론 이 얘기가 정답은 아니다. 


이 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사람만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마제소바는 정말 맛있다. 직접 먹어봐야 안다. 사람도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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