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철십자가(La Cruz de Fierro)를 지나니 뭔가 헛헛하면서도 개운하다. ‘철십자가에 돌 내려놓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찾아온 허전함은 이루 표현하기 어려웠다. 시원섭섭하다는 것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철십자가에서 내려와 도착한 도시는 뽄페라다. 앞으로 남은 200㎞ 남짓한 길 중 가장 큰 도시다.
우리는 철십자가만큼 뽄페라다에 오기를 고대해왔는데, 그 이유는 바로 템플기사단 때문이었다.
여행할 때 박물관, 미술관은 꼭 들러야 하는 나에게 템플기사단과 관련이 있는 도시인 뽄페라다는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물론 동행인은 나와 취향이 달라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뽄페라다만큼은 달랐다. 전쟁, 군대, 무기 등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템플기사단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이 있는 뽄페라다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1282년 템플기사단이 성을 세웠는데 템플기사단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교회 세력에 의해 14세기에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주인 잃은 성의 소유권을 두고 귀족들의 기나긴 다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템플기사단 성은 순례자라면 할인을 받아 1인당 4€에 입장가능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곳곳에 새겨진 템플기사단의 십자가는 뽄페라다의 상징과도 같은데, 도시 템플기사단 성 뿐만 아니라 엔시나 바실리까, 비에르소 박물관(Museo del Bierzo)에도 새겨져 있다. 뽄페라다는 템플기사단의 도시라고 표현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지어진 성벽을 타고 올라가면 성곽 주변을 도는 실 강(Río Sil)과 도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숲을 개간하여 지어진 만큼 높은 지대라 탁 트인 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곳에서 신의 이름을 빌린 군대가 훈련을 받고 순례자들을 지켰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내가 그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7월에는 템플기사단성 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이렇게 또 어긋나는 시기가 무척이나 아쉬울 따름이다.
템플기사단성을 나와 엔시나 바실리까(Basilca de la Encina)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템플기사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성모상(Virgen de la Encina)이 있는데, 템플기사단이 성을 짓기 위해 숲을 없애는 과정에서 참나무 숲에서 발견한 것이다. 1958년 엘 비에르소의 수호신으로 선포된 엔시나 성모는 아스또르가(Astorga)의 또리비오(Toribio) 주교가 5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아기 예수상과 성모상을 가져온 것으로 13세기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이 밀려오자 참나무 숲에 숨겨놓았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구한 가톨릭 역사의 성지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발 닿는 곳 어디나 이야기가 있고 사연이 있지만, 템플기사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뽄페라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연이 담긴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권력이란 묵히면 썩기 나름이고 세력이 강해지면 견제당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결국 이단으로 몰려 해체되었던 템플기사단.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산을 탐낸 이들의 끊이지 않았던 싸움. 그 길고도 깊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는 뽄페라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