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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Aug 22. 2023

5천 년을 살아낸 나무의 마지막 시간

우리도 이 한그루의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이 온 도시를 병풍처럼 휘둘러 감싸고 있는 이곳 산티아고의 경치는 넋을 놓고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 절경이다. 문제는 이 산맥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 지난여름 내내 산불의 연기가 한동안 온 도시를 휩쓸고 난 후, 겨울이 왔지만 겨울에는 또 짙은 스모그가 도시를 무겁게 덮어버려 비가 내려 이 공기를 씻어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올해 한국의 여름이 찜통더위였던 것처럼 지구 반대편 남미의 올해 겨울도 이상하리만치 무덥다. 한 겨울에 봄꽃들이 피어난 길을 걸었고,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갔다가 땀을 흘리며 집에 돌아오기를 며칠씩 반복하니 겨울이 그리웠다. 그래서 파타고니아로 떠났다.

이곳의 흔한(?) 도시 풍경

1830년대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브라질을 거쳐 남미의 최남단 마젤란 해협(Estrecho de Magallanes)을 돌며 거쳐갔을지도 모르는 발디비아(Valdivia)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처음 건설하기도 했던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 )에 의해 1552년 처음으로 도시가 된다. 

발디비아의 지형적 이점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발디비아 깊숙하게 도달하는 물길은 배로의 이동이 용이했기 때문에 식민지 기간 중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지만 이곳의 자연은 그 자체로 생태계의 보고였다.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룬 1810년 이후, 엄청난 대지와 풍부한 자연재원이 있었던 칠레의 남쪽 지역으로 칠레 정부는 적극적으로 유럽사람들의 이민정책을 추진한다. 이때 대거 칠레로 이민을 온 독일계 이민자들은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칠레의 국가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독일 이민자들이 집중적으로 많이 거주하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발디비아다.  


17세기 쯤부터 다른 유럽국가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스페인 사람들이 건설한 요새들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다


발디비아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한그루 있다. 알레르세 밀레나리오 (Alerce Milenario) 혹은 위대한 할아버지(Gran Abuelo)라고 불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나무다. 습기에 강하고 잘 썩지 않아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거의 모두 벌목을 당했다. 이제는 몇 그루 남지 않은 나무들 중 이 할아버지 나무의 현재 추정되는 나이는 5,484년 정도라고 하는데 지름이 4미터가 훌쩍 넘는 나무를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정확한 나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5,484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문가들에 의하면 80% 이상의 확률로 이 나무는 5천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세월이 아찔하다.

카메라에도 다 담기지 않는 거대함

이 나무의 밑동은 이제 거의 생명의 활동이 포착되지 않아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기한 사실은 5천 년이 넘게 존재하고 있는 나무의 겉과 그 뿌리에는 새로운 생명들이 또 다른 생태계를 이루며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고 긴 세월을 버텨낸 나무는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생태계가 되어 다른 생명들의 거처가 되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 나무가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양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지형적, 기후적 행운의 총체적 합으로 판단된다. 이 종(種)의 다른 나무들이 몇 그루 들이 모여 위치하고 있는 지역보다는 약간 더 춥고 고립된 지역에 홀로 꿋꿋하게 자리를 잡은 이 나무는 그간의 지진, 화재 등의 모든 역경 속에서 본인의 방식대로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이 나무의 정확한 나이를 측정해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던 전문가들도 결국은 그런 것들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 할아버지 나무 앞에서 그저 고개를 떨궜다. 이 자체가 하나의 작은 숲이 되고, 작은 우주가 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앞에서, 찰나를 살다가는 인간은 그저 조용히 경의를 표할 뿐이다. 

지금 칠레 정부는 이 숲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을 놓고 시끄럽다. 이 고속도로는 두 소도시를 이어주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는 입장과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이 숲에 사는 할아버지 나무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이 숲의 많은 멸종위기에 처한 생명들에게 큰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펼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수천 년을 살아온 이 할아버지 나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더운 겨울 날씨와 일부 사람들에 의한 고의적/非고의적 화재, 그리고 어쩌면 정말 건설될지도 모르는 거대한 고속도로의 위협은 멸종위기의 이 나무의 마지막 순간을 앞당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위협들 앞에서도 아무런 미동 하나 없이 지난 5천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나무는 그래서 더없이 경이롭고 또 그래서 더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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