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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Aug 28. 2023

통장잔고 6만 원으로 먹고사는 일

남미의 살벌한 빈부격차는 어디에서 왔을까? 

남미의 유럽을 지향하는 칠레는 실제도로 남미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다. 

(21년 기준 1인당 GDP는 칠레: 16,500달러, 페루: 6,700달러, 아르헨티나: 10,700달러, 브라질: 7,500달러, 콜롬비아: 6,100달러, 파라과이: 5,400달러, 볼리비아: 3,400달러.. 대한민국은 35,000달러)  


며칠 전 수도 산티아고에 위치한 구시가지에 위치한 한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줄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뭐든지 느린 남미에서는 드문 일은 아니지만) 기다리다 지쳐 카트를 잠시 놓고 계산대 가까이로 가봤더니 남미에 몇 년째 살고 있는 내게도 꽤나 충격적인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와 딸로 보이는 두 여자가 계산원의 모니터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잔뜩 계산한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빼고 있었는데 계산원이 슬슬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래서 지금 통장에 다 해서 얼마가 있는 건데요?'라고 묻자 그 아주머니가 '4만 페소 정도는 분명 있을 텐데...'라면서 이미 7만 페소가 넘게 찍혀있는 계산대에 서서 꼭 필요한 것과 다음에 사야 할 물건을 분리하며 혹시 현금을 갖고 있는 게 있는지 온 주머니를 다 뒤지고 있었으니.. 그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아주머니의 통장 잔고까지 알고 나서야 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4만 페소면 우리나라돈 약 6만 원 정도다. 혼자 사는 나도 한번 장을 보면 뭘 많이 사지 않아도 5만 페소 이상은 거뜬히 나오는데 4만 페소로 한 식구를 위한 장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팬데믹 이후로는 특히 많이 오른 식재료 가격은 특히나 대다수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칠레의 거의 모든 슈퍼마켓에는 이렇게 보안 경비들이 늘 지키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옆동네를 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백인들이 멋스럽게 옷을 갖춰 입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쇼핑을 한다. 그들에게 4만 페소는 그들의 하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액수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같은 칠레사람들이다. 한 나라로 묶어버리기에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같은시대의 다른 공간들

15~17C 대항해 시대 때 유럽인들이 신대륙(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곳 남미는 원주민들이 각기 다른 제국을 형성하며 모여 살던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었다. 남미의 역사를 아주 간단히만 보려고 한다면 이 유럽인들에 의한 신대륙 발견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 전, 그 시대의 뛰어난 천문학기술과 무상 의무교육이라는 매우 선진화된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던 아즈텍 문명(1428~1521년)은 멕시코 등지를 중심으로 약 100년 정도 번성했지만 스페인 군대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수학과 천문학이 매우 발달했었던 마야 문명은 현재 과테말라 지역에서 시작되어 250~900년까지 지속되다 원인 모를 이유로 멸망했다가 950년에 다시 신(新) 마야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1539년 제국 내 권력싸움이 극대화되어 자멸한다. 또 농업을 중심으로 탄탄한 제국을 구축해 전성기를 누렸었던 잉카문명(1438~1533년)도 스페인군대의 입성으로 허무하게 멸망해 버린다. 


아즈텍, 마야, 잉카문명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유적지

이렇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남미대륙에 대한 식민지화와 지배는 약 300년간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많은 유럽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며 당연히 유럽인들과 인디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때 겉모습은 똑같은 유럽인인데도 유럽 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스스로를 순수혈통인 페닌술라르(Peninsular) 계급이라고 칭했으나, 외모가 유럽인이더라도 이 남미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크리올(Criollo)들이라고 해서 한 계급이 낮았다. 이 크리올 중에는 완전한 백인도 있었고 혼혈도 있었는데 이들은 본인들의 뿌리는 유럽이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이나 흑인 노예들과는 아예 다른 혈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으나, 동시에 페닌술라를 계급들로부터는 무시당하고 차별을 받았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상태에 놓여 있다. 
                                                               - 중남미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


결국 이 차별과 멸시는 크리올들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어 1808년~1826년 사이에는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를 제외한 모든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을 이룬다. 문제는 독립을 했다는 것이 그 후 각 나라가 택한 정치적 노선과 무관하게 그 나라 국민들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각 나라에는 지배계층들이 계속 있었고(지금도),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는 그들이 나고 자란 남미가 아닌, 유럽이라고 생각하며 한 나라의 정치부터 경제까지 모든 분야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남미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치부패와 살벌한 빈부격차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겠다.


혈통에 대한 문제는 한 인간의 뿌리에 대한 가볍지 않은 문제인 데다가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기득권층의 물갈이 같은 건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중남미의 빈부격차 문제는 그만큼 뿌리 깊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칠레의 가난한 많은 서민들은 21세기의 피지배 계급으로서 (극단적인 예이긴 하겠지만) 4만 페소로 한 식구가 먹을 장을 봐야 하고, 유럽 이민자 출신의 백인들은 본인들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같은 나라에서 살면서도 이 두 세계는 좀처럼 마주칠 일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은 막연히 유럽을 동경하고, 내 주변에도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칠레 친구가 독일 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며 이 세상은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을 한다. 21세기 현대사회에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온 존재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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