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삶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이맘때쯤, 나는 홀로 브라질 상파울루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한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오루쁘레뚜 (Ouro Preto, '검은색 금'이라는 뜻) 도시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이곳은 18세기 금광이 발견된 뒤 골드러시가 일어나서 브라질의 중심을 아예 바꿔놓은 곳이다. 원래 브라질의 첫 수도는 이보다 더 위에 위치했던 사우바도르(Salvador)였으나 금광이 발견된 뒤 이를 수출하는 항구가 인접해 있던 도시 히우 지 자네이루(Rio de Janeiro)가 훨씬 실용적인 대안으로 떠올라 1763년경부터 비교적 최근인 1960년까지 수도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오루쁘레뚜에는 엄청난 수의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고 포르투갈 사람들도 본국에서 이주한 수십만 명이 섞이며, 이곳만의 독특한 바로크식 문화가 생겨났다.
그렇게 이 작은 도시를 구석구석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어떤 건물의 처마 아래에 들어가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곧 어떤 브라질 소년도 비를 잔뜩 맞고 지붕 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나를 뒤따라온 낯선 브라질 남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 친구, 나를 계속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브라질은 20세기 초부터 벌써 대규모의 아시아 이민자들(특히 일본인)이 유입되어 큰 도시에서는 아시아 사람들을 보는 일이 매우 흔하지만 이런 작은 도시에서는 그래도 아시아 사람이 드문 편이라서 내가 신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이 친구 처음 본 사람에게 냅다 고백까지 한다. "Eu gosto de você. (나는 네가 좋아.)" 그 얼토당토 않은(내 기준에서) 급고백에 별 반응이 없자 혼자 민망했는지 그때까지도 계속 내리고 있는 빗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이 브라질 사람과의 몇 분 간의 짧은 순간이 다시 문득 생각이 났던 건 10년이 흐른 지금 다시 브라질에 돌아와서였다. 흑인부터 메스티소(흑인+유럽 혼혈), 백인, 토종 인디언, 아시아인까지 모두 한데 섞여있는 브라질은 알록달록한 채소와 과일들이 한데 섞인 맛있는 샐러드볼 같은 나라다. 거리 곳곳에서 흑인+아시안, 백인+흑인, 아시안+백인, 아시안+메스티소 등으로 이루어진 가족들과 혼혈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튈까 봐 함부로 도전하기 어려울 것 같은 독특하고 다양한 색과 디자인의 옷이나 스타일도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일반화를 하긴 어렵지만)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찰나의 감정일지라도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순간에는 너무 무겁고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초리도 없지만, 어찌 됐든 본인이 좋으면 그만이다.
나는 브라질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봤을 때 이런 브라질의 매력을 최고조로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이들의 음악에서라고 생각한다. 브라질이 가진 이미지 때문에 보통은 경쾌하고 밝고 빠른 축제음악이나 가벼운 보사노바 정도가 브라질의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브라질 음악을 너무 단순화시켜서 보는 시각이다. 브라질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생각나는 대로 표현해 보자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음악의 리듬과 곡을 이루는 음악의 형식, 가사, 그것을 구성하는 보컬과 악기의 전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경계 없이 그 틀 안과 밖을 자유로이 오가는 어떤 예술(혹은 삶)의 한 형태'정도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무경계와 자유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간다. 그래서 브라질의 뮤지션들은 각자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그 세계가 어떨 때는 대중적이지 않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고유하고 단단하기에 타인에게 평가받을만한 거리로 그렇게 쉽사리 전락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을 세상을 향해 열어두되,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하고, 자신의 색이 뚜렷한 세계를 구축한다.
그날밤 공연장에서 이 뮤지션은 말을 하다가 그 말이 노래로 이어지고, 노래를 하다가 그 노래가 악기의 연주 소리로 넘어갔으며, 연주를 하다가 그 악기 소리가 몸짓(춤)으로 이어지고, 그 춤이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연결되는 신기한 무언가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음악을 배워서 연습하고 준비한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인 공연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삶의 단편을 공유하는 행위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터였다. 이것이 브라질 문화의 정수가 아닐까. 그 어떤 얽매임도 없이 마음껏 세상을 나의 무대로 만드는 이들의 이런 삶의 리듬감 한 스푼씩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브라질은 결코 완벽한 나라가 아니다. 치안문제부터 부패문제, 양극화 문제등 문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브라질을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두 나라는 서로 대비되는 다른 문제들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브라질처럼 극심한 치안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는 덜할지라도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더 어둡다. 경계와 틀이 주어져 있고 거기에다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되고 수용되는 보편적인 삶의 목표 같은 것들이 존재하니 그럴 수밖에. 출산율 0.7명이라는 숫자가 놀랍지 않다.
티끌만한 오류 없이 완벽한 연주도 좋지만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해 나를 틀에 맞추려니 이보다 더 피곤한 일도 없다. 오히려 찌질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독백, 춤과 노래, 악기연주와 스탠드업 코미디가 마구 뒤섞인 나만의 연주를 하는데 집중하는 편이 낫겠다. 브라질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리듬감 한 스푼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