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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Feb 21. 2024

우리의 사랑은 순수해야 하는가

순수한 사랑의 미학

모든 욕심,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난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었던 법정스님이 생전에 마지막까지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 고백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 그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뻐지는 것은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법정스님도 다른 집착들은 놓았어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뻐지는 마음까지 동요하지 않게 하는 것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힘든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뒤집어 이야기해 보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매력적인 무언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자연이나 어떤 이의 마음 같은 곳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이 창조한 '예술'이라는 범주에만 한정 지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생뚱맞게 갑자기 나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했는지도.. 




예술 이론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보자면 기원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근 2천 년 이상을 군림해 온 예술의 기본이론은 '모방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어떠한 대상의 겉모습을 모방하느냐 대상의 이데아에 대한 본질을 모방하느냐 등에 대한 철학적 관점차이가 존재했고, 이때라고 감정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또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은 무언가 있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좌) 밀로의 비너스, (우) 다빈치의 <모나리자>.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며 인간의 이성이 중시되었던 18세기를 지나며 예술은 무언가를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개성과 감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예술은 다름이 아닌 예술가 개인의 감정표현의 결과라는 새로운 예술 이론의 흐름(표현론)이 등장한다.

(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 (우) 고흐의 <구두 한 켤레>

19세기에 들어서 예술은 자율적이어야 하며, 어떤 내용을 갖어도 상관없다는 유미주의가 득세를 하고, 20세기가 되자 기존의 모든 형식과 틀, 관념에서 벗어나 소위 '내가 초등학생 때 그렸어도 저거보단 잘 그리겠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추상화의 시대가 등장한다. 큰 캔버스 위에 알 수 없는 질서로 색이 칠해져 있는 그림들은 딱히 작가의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작가 본인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이해를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좌) 칸딘스키의 <평행한 사선> (우) 피카소의 <기타>


이 추상화를 설명하는 이론인 '형식론'은 그래서 해당 작품 뒤에 그 어떤 숨겨진 심오한 메시지보다도 그저 그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 자체와 그 요소들 하나하나가 이루는 관계에 그 작품의 가치를 집중한다. 예술이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인간을 고양시키거나 하는 등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 아니라 드디어 예술 자체가 존재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되는 영역으로 올라선 것이다. 여기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인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순수하다:
1.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다.
2.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 

순수하다는 단어를 쓸 곳이 마땅치 않은 요즘, 우리는 이 단어를 약간은 진부하게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명사에만 거의 독점적으로 붙여서 쓰는 것 같다. 

사랑: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위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순수한 사랑'을 정의해 보자면 다른 어떤 다른 목적이나 의도 없이 누군가를 몹시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 자체로 그 존재목적이 달성되는  정도로 설명할 있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생각도 든다. 사랑은 그러면 꼭 순수해야 하는가? 순수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인가? 예를 들어, 한 여자가 A라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그 사랑의 배경에는 그의 안정적인 직업과 여유 있는 집안사정이 그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당사자인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순수예술과 순수한 사랑을 결코 대등관계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순수예술은 사실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제 아무리 예술이라지만 공감되지 않는 재미와 감동에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순수한 예술이라고 해서 응용예술처럼 어떠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보다 결코 우월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의견이긴 하겠지만 나는 사랑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기에 꼭 그것이 순수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육체적인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 일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 그 자체 외 다른 부수적인 것들(위의 예시처럼 타인의 사회적 조건들 같은)이 바탕이 되었을 때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이 돌아가는 것처럼, 각 개인의 가치관이 너무나 다양해진 요즘에는 사랑도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니즈가 충족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다'는 순수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면, 무엇에 순수해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다시 밤에 눈을 감기까지 각자 '내 삶의 질 향상'이라는 고정불변한 절대가치를 위해 몸을 움직이며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에게 그런 사심이나 다른 어떠한 목적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라고 하기에 순수함은 너무나 가성비가 떨어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가 그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인 '순수함'이라는 형용사를 들이밀만한 곳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 다른 목적이나 동기가 있다면 그건 꼭 그 존재가 아니어도 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나의 감정을 움직이는 여러 가지 외적 동기들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어떤 이의 존재 자체로 나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완전해지는 그런 것이 순수한 사랑이라면... 아,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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