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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Dec 31. 2021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8

뢰제의 나라

올 가을부터 서울시내 한 국제학교에서 초등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집중시간이 짧고 에너지가 넘치는 스무 명 남짓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고 거침이 없는 아이들은 봐주는 게 없다. 수업 첫날, 며칠 동안 공들여 준비한 자료를 설명하는데, “재밌는 거 한댔잖아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하며 한 칼에 나의 기를 꺾어버렸다. 


내가 하는 말끝마다 “나는 싫은데.” “아닌데” 하며 수업의 맥을 뚝뚝 끊어 놓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이 시간 숙제 없애면 안 돼요?” “선생님은 말 잘 듣는 애들만 이뻐하죠?” 하며 도발을 하는 녀석도 있다. 참 이상한 건, 말 잘 듣는 모범생들은 그대로 이쁘지만, 오히려 마음이 쓰이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 건, 장난이 심하고, 말 안 듣는, 고오얀 녀석들이다.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얼굴을 하며 훈계를 해도, 스티커나 학용품 등 뇌물을 준비해도 그때뿐, 아이들의 마음을 사는 게 영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운 짓 골라하는 녀석들이 가진 특별한 장점들이 있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그 아이들의 장점을 골라 지속적으로 칭찬해주니 녀석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숙제도 꼬박꼬박 해오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첫 시간 발표하다 울며 노트를 찢어버리던 아이가, 이제는 숙제도 먼저 챙기고, 좋은 수업 분위기를 만드는데 앞장서는 든든한 조교가 되었다. 


자신도 모르던 장점을 일깨워주고, 착한 본성에 집중하게 하면서, 나쁜 습관들이 조금씩 지워져 갈 수 있다는 걸 믿고 기다려주는 것, 어렵지만 그게, 교사가,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인 듯하다. 


어쩌면 내 아들들도, 남편도, 또 내 안에 존재하는 아이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는, 사랑으로 보아주는 눈, 그리고 믿음과 기다림 그게 아닐까? 실천은 늘 어렵지만 말이다. 


얼마 전 집 근처 길가에 예쁜 수제 잼 가게가 문을 열었다. 빨간색 문을 열고 들어간 가게 한 켠에는 고운 때가 탄 헌책들이 쌓여 있었다. 사장님 지인이신 독서선생님께서 팔려고 내놓으신 책이란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랑받았던 귀태가 나는 책들은 주인의 책에 대한 진심과 고운 영혼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표지의 일러스트가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뢰제의 나라’. 주인공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저승사자의 실수로 혼이 하늘로 올라가 겪는 모험담이었다. 대강만 훑어만 봐도 빨려 들어갈 정도로 쉽고 재미있어서, 낭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첫 부분에 주인공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딸의 사투리 연기를 들으시며 웃음 지으실 엄마,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졌다. 


12살 소년 다함이는 부모를 잃고 동생과 함께 외가에 산다. 어느 날 문화재 도굴꾼을 발견하고 도망치다 차에 치인 다함이의 혼이 저승사자의 실수로 신들의 나라인 뢰제의 나라로 올라간다. 뢰제는 신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로, 뢰제를 모시던 대제들의 반역으로 혼이 궁에 갇혀 버리고, 그 이후로 뢰제의 나라는 평화를 잃게 된다. 신민들은 살아남은 뢰제의 아들이 뢰제의 혼을 구하고 하늘나라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줄 거라는 이야기를 믿으며 살아간다.  


다함이는 뢰제의 아들인 천랑을 만나게 되고 뢰제의 혼을 구하는 여정에 함께 한다. 죽음을 무릎선 온갖 고생 끝에 천랑은 뢰제의 혼을 구하고, 다함이는 다시 이 땅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하늘에 떠있는 천랑성을 바라보며 뢰제의 나라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묻는다. 


이 책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마법에 걸려 타고난 선한 신성을 잃고 괴물로 변해버린 네 마리 신수의 신성을 되돌리는 장면이었다. 난폭한 백호가 의로움을, 아둔한 현무가 지혜를, 간교한 청룡이 사랑과 어짐을, 마지막으로 교만하고 허영스런 주작이 아름다운 노래를 되찾는다. 매번 신수의 신성을 깨울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천랑의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 그리고 헌신에서 나왔다. 그 천랑을 고비마다 버틸 수 있도록 도운 건, 다함이의 무조건적인 믿음이었다. 


이 대목을 낭독하며, 나는 내 안에 숨어있는 가장 난폭한 목소리와 가장 의로운 목소리, 가장 아둔한 목소리와 현명한 목소리, 허영에 들뜬 목소리와 진정성 가득한 목소리를 모아 연기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내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어쩌면 내 안에도, 우리들 모두 안에도 선함과 악함의 양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신이 선물한 착한 본성을 깨울 수 있는 열쇠 또한 사랑과 믿음, 기다림이 아닐까? 순간 내 어린 제자들의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3개월 동안 병원 중환자실에서 누워있던 다함이가 깨어난 건 기적이었다. 다함이는 깨닫는다.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사랑과 마지막으로 다함이의 손을 잡고 기를 불어넣어 준 천랑 덕분이었다고. 


내년 설이 되면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지 만 12년이 된다. 아버지는 당신을 일으켜줄 줄기세포와 로봇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꼭 살아남아 일어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지리한 시간 동안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그 오랜 시간 아버지를 살아있게 한 건 엄마와 동생들의 사랑과 헌신이었으리라.  


하늘나라 왕의 아들이시여!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손과 발, 영혼에 힘을 보태주소서! 


아버지와 사랑의 이야기 여정을 시작한 정말 특별했던 한 해, 열 번째 책의 낭독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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