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셨던 아버지는, 팔십이 넘으신 지금도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넘치신다. 배구, 축구, 야구 경기의 중계 방송 시간을 확인해두시고는 빼놓지 않고 시청하신다.
코로나로 밖에도 못 나가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학생 아들도 언젠가부터 축구에 열광한다.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있으면, 새벽4시에도 일어나 경기를 관람해야 한다며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은 왜 축구에 열광하는 걸까?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아버지는 “애국심이지.”라고 대답하신다. 같은 질문을 아들에게 던지면 눈을 반짝이며 ‘축구란 더 이상 물리적인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지역간, 나라간 축소판 전쟁과도 같은 것’이라며 유럽축구팀 역사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마음을 대를 이어 꽉 잡고 있는 축구란 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버지께 읽어드릴 책을 찾아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수많은 책들이 자극적인 제목과 화려한 표지디자인을 뽐내며 ‘나를 바라봐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유독 눈을 끄는 한권의 책이 있었다. 표지에는 흡사 일본 무사와도 같은 단정함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한 중년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였다.
책 제목은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다.’라는 손흥민 선수의 고백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좋아하실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집에 와 저녁 상 치우고 읽기 시작해 빠져들 듯 읽다가 잠이 들었고, 책의 나머지 내용이 궁금해 새벽 3시에 잠이 깨보기는 처음이었다.
손흥민이 다른 차원의 축구선수이듯, 그 아버지 또한 다른 차원의 아버지인 듯했다. 아들을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키우는 것이 목표가 아닌 '가장 행복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연구하고, 솔선수범한 그의 이야기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축구와 책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준 두 가지 축임을 고백하는 저자의 이 책은 어떤 철학자의 철학서나 교육전문가의 교육이론서보다 강렬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구약성경인물 다윗왕은 평생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노! 전쟁을 많이 치룬 다윗이 지은 성전은 피의 상징이 될 것이니, 대신 아들 솔로몬왕이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답한다. 다윗왕은 아들 솔로몬이 최고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건축자재, 자금을 준비한다. 그리고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이라는 가문의 소명을 남긴다. 아버지의 기도로 만들어진 준비 속에 솔로몬왕은 역사에 오래 남는 성전을 짓는다.
이 책을 낭독하는 내내, 성경 속 이 이야기가 마음속에 맴돌았다.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모자란 게 많았던 손선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디딤돌로, 아들이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게 헌신했다. 한국 축구 꿈나무들을 위한 축구장을 만드는 일까지, 그는 축구를 통해 진리, 사랑, 소명의 이야기를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만나는 외국인 학부모님과 그 나라 축구선수와 축구팀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아들은 참 좋은 분이시라며 “기본적으로 축구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거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세계적인 축구선수 중 인성이 나쁜 사람은 드물다고.
요즘 세계적인 뇌과학 연구소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간 관계가 부모보다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큰 아이는 친정아버지에게는 첫 손주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손자를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버지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으시다니!' 하고 생각했었다. 어린 손주를 품에 안아 올리시며, 하늘의 비행기도 보여주시고 아파트 정원 감나무에 열린 감도 보여주시곤 했었다.
아마도 그 때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내 귀한 손자야. 앞으로 네가 살아갈 삶은 쉽지만은 않을거란다. 힘들고 지칠 때 그 때마다 축구경기를 보렴. 그 안에는 열정, 사랑, 그리고 진리의 드라마가 살아 있단다. 그 이야기들이 너를 버티게 해주고 힘 나게 해줄거란다.” 라고 이야기했던 게 아닐까?
할아버지 키보다 한뼘이나 더 커진 사춘기 손자의 영혼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할아버지~예전에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대로 축구의 힘이 대단하더라구요. 제가 학교 전학하고 어려운 상황서 버텨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제게는 축구보다도 더 큰 힘을 주는 게 있어요.
그건 바로 오랜 시간 장애를 가지고 사시면서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시고, 깊은 사랑의 눈초리로 저를 봐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예요. 평생 할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않겠습니다!”
십 수년전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파트 단지 감나무는 올 가을에도 생명력 가득한 짙은 주황색의 감들을 여럿 매달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