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초등생들의 국어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난가을,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한 여학생이 ‘부자’라고 답을 했다. 더 정확히는 ‘강남 건물주’였다.
부끄러운 듯, 그러나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꿈을 밝히던 여학생의 모습에서 그 꿈은 단지 어린아이의 장난이나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를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그 아이가 꿈을 이루게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훑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부자 이야기’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자를 생각하며 읽어 가기 시작했다.
책 속에 소개된 10명의 부자들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부에 대한 지혜로운 태도와 가치관이 잘 녹아 있었다. 옛날의 부자들은 너무 높은 벼슬이나, 나누지 않는 부는 오래가지 못하고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진리를 삶속에서 실천하고 살았다. 재물을 이기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닌 재물의 통로가 되는 축복을 이야기하는 성경적 물질관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중 제주 거상 김만덕의 이야기가 몇몇 여학생들에게 흥미로울 듯하여 꺼내 읽다 보니, 나 또한 그녀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만덕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함께 시나리오 형식으로 색다르게 구성한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라는 책을 찾았다. 시나리오 형식으로 쓰인 책이 낭독하기에도 그만이었다.
만덕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양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 부모를 잃고 관기의 양녀가 된다. 신분제가 엄격하던 시대에 관에 호소하여 양민의 신분을 회복하고는, 거상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행상으로 시작하여, 객주를 차린 만덕은 남성 중심의 시대, 기존 상인들의 텃세에도 굴하지 않고, 배를 사서 육지와의 직거래를 통해 돈을 벌고, 당시에는 드문 주문 생산제까지 도입하는 등,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된다.
조정에 공물 진상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흠모하며 든든하게 도와주던 소중한 벗 문명을 잃은 그녀는 ‘진정한 거상이란 돈에만 집착하지 않으며 옆을 돌아보고 주변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 임을 깨닫는다.
최악의 기근이 제주에 닥친 해, 만덕은 자신의 전재산을 풀어 제주도민을 살린다. 정조 임금 또한 만덕의 나눔에 감동하여 상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왕과 왕비를 만나고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알려 조선 전체에 유명세를 떨친다.
당시 좌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을 쓰고, 다산 정약용은 시를 남겼으며 추사 김정희는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는 뜻의 편액까지 헌사하는 등 시대를 감동시킨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이 책의 저자 정창권 고려대 교수는 김만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목표한 바가 있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굴의 의지, 새로운 방식을 과감하게 시도한 창의력, 주위의 어려움을 돌보고 행복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마음까지, 그녀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흠모의 감정을 한꺼번에 일으키는 인물이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보다 능동적인 인물이었고, 일찍이 나눔의 가치를 깨달은 말 그대로 ‘큰 상인’이었다.’
김만덕이란 인물의 삶이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데다가, 책도 드라마 대본과 같이 대화체로 쉽고 재미있게 쓰여, 책을 받아 든 그날 하루에 다 읽어낼 수 있었다. 낭독하기에도 너무나 재미있는 책이었다. 만덕과 주변 인물, 그리고 만덕을 경계하는 치졸한 경쟁자 상인 등 각기 개성이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며 낭독을 해가니 마치 드라마 배우가 된 듯 즐겁고 신이 났다.
즐기며 빠져들어 한 낭독이 티가 났는지, 시작한 날 저녁 친정어머니께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만덕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실력이 점점 일취월장하십니다. 우리 따님 잠재능력이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팔십에 가까우셔도 자식의 발전은 엄마를 힘나게 하나보다. 오십이 넘어도 엄마의 칭찬은 나를 춤추게 하듯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위인으로 불리는 여성인물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유관순 열사나 신사임당 정도.
어린 제자의 꿈으로부터 찾아낸 200년 전 김만덕의 이야기가 어린 제자에게, 나에게 그리고 노년의 엄마에게, 어려운 환경서도 지지 말고, 잠재력을 꽃피우고, 사랑을 나누며 살라고 이야기를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