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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Jun 04. 2022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13

요한복음

지루하던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이 되자 몇몇 지인들의 부모님 부고가 날아들었다. 본디 노인들은 여름과 겨울나기가 힘드신 거지.


작년만 해도 동창모임 멤버 중 자신이 제일 오래 사실 듯하다며 자신감을 내비치시던 아버지도 봄이 시작되자 방광염 증세로 열도 오르락내리락하고 기운이 급격하게 떨어지셨다. 좋아하던 스포츠 중계도 못 보시고 계속 잠만 주무신다며 엄마도 한숨을 내쉬셨다.


 "예부터 저승 잠을 잔다고 했단다. 이젠 하늘이 데려가나 보다."


예전엔 기운이 떨어지셨다가도 곧 다시 회복되곤 하셨는데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다. 몸은 못 움직이셔도 정신만은 젊은 사람도 못 따라갈 정도로 꼬장꼬장 명철하시던 아버지도 힘이 떨어지시니 대화도 쉽지가 않다. 


기분이 어떠신지 물으니 "구슬퍼~"하신다. "왜요?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세요?" 하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신다. 


기운을 못 차리시는 아버지를 보니 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을 할 때마다 말 못 할 먹먹함이 가슴 한편을 누르는 듯했다.


이른 봄 찬란한 햇빛 아래 빛나다가, 하룻저녁 봄비에 온통 바닥에 몸을 붙이고 누워있는 벚꽃잎을 보듯 애처롭고 허무했다. 


이건 내가 그동안 책을 읽어드리며 그려 온 결과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상황이었다. 책이 치유의 효과를 가지고 딸의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 아버지가 일어나지는 못하셔도 조금씩이라도 좋아지는 모 그런 이야기여야 하지 않나? 


어쩌면 아버지가 나의 낭독 책을 들으실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난 무얼 해야하나 하는 물음이 생겼다. 


일단 성경을 읽어 드려야겠다.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와 함께 낭독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버지, 엄마!


오늘이 어버이날이에요.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또 오랜 노년의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우리 삼 남매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심을 감사드려요. 


아버지 엄마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한 게 지난해 5월 초이니 딱 일 년이 되었어요. 그동안 열다섯 권 이상의 책들을 함께 읽으며, 제가 엄마, 아버지의 딸임을 감사하는 시간을 보냈네요. 


지난번 책을 끝내고, 이번엔 어떤 책을 고를까 책방에도 가보고, 도서관에도 가보고, 또 독서선생님께 자문도 구해봤지만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께서 힘이 많이 떨어지시고 열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뵈니 마음이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러면서 진정한 치유의 힘을 갖는 책을 고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른 책이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서예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책들을 읽었고, 책장에만도 수백 권의 책들이 꽂혀 있지만, 만약 불이나 지진이 나서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면 전 단연코 성경을 고를 거예요. 성경만큼 재미나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진리가 담겨있고,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책은 없다고 믿으니까요.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읽었던 첫 책 로빈슨 크루소 생각나시죠? 로빈슨 크루소가 28년이란 긴 시간을 무인도서 혼자서 살아남았던 비결은, 아마도 성경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저를 믿어주시는 만큼, 마음을 열고 들어봐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 생명의 힘을 얻으시고, 두려움과 구슬픈 마음을 위로받으시길 기도해요. 저도 딸로서 간절한 기도를 담아 최선을 다해 읽어볼게요~ 


아버지, 엄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책을 읽어 내려갈 때 보다 몇 배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영혼의 힘을 그러모아 한 문장 한 문장씩 읽어 내려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선 알 수 없는 미묘한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녹음 버튼을 멈추고 한참을 깊은 호흡을 내쉬고 나서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전해졌는지 요한복음의 낭독을 마친 날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요한복음을 읽으며 예수를 느꼈는데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낭독 오브 더 이어입니다^^'


아버지가 걱정되는 마음이 날 자꾸 친정으로 끌어당겨 마치 일요일 친정에 가기 위해 한 주를 사는 듯했다. 아로마 오일로 손발 마사지도 해드리곤 했는데 이제 손은 닿기만 해도 아프시다며 물리치셨다. 


"올해는 네가 팔순에 사드린 난에 꽃이 안 피었어. 매해 철마다 진분홍 꽃이 올라왔었잖아.... 저렇게 허망하게 가게 되면 니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서 그렇지." 하시고는 눈물을 글썽이신다. 


엄마는 아버지 사고 후에 눈물이 말랐다고 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다. 13년을 지긋지긋하게 고생했어도, 50년 넘게 함께 산 남편에게 생의 마지막 그림자가 드리운 듯 하니 눈물을 숨길 수는 없나 보다. 


새벽 내 대변 수발을 하고 난 엄마에게 아침에 뭔가를 또 요구하시니 엄마는 힘이 들어 사람을 그만 들볶으라고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방을 나가버린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되니 네 엄마가 속상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다. 


기운이 없어도 유독 손주들 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다 똑똑해요. 김 씨 집안 다섯 손주가 저마다 잘 될 거예요." 하니 핏기 없는 아버지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오른다.  


"그게 그렇게 좋으세요?" 하니 "그럼! 그것 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하신다. "할무이, 손주들이 다 잘 될 거래. 꼭 그 모습 다 보고 와요." 하신다. 


엄마. 아버지의 결혼기념일에 큰 동생 내외가 선물했다는 꽃다발 속 흐드러지게 핀 작약도, 수줍은 장미꽃 봉우리도 두 분의 오십이 년 결혼생활의 구비구비마다 떠오르는 희로애락의 향기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버지 다음 주에 또 올게요." 인사를 드리니 아버지가 나를  또렷이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셨다. 


'내 사랑하는 믿음직한 딸 고맙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아버지! 나도 아버지의 딸인 게 자랑스럽고 감사해요~ 부디 잘 버티세요' 속으로 이야기하며 오랫동안 아버지의 눈을 마주보며 서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책상에 앉아 목소리를 가다듬고 책장을 넘기던 순간들이, 그리고 병상에서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순간들이 아버지와 내 안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의 존재를 일깨워준 듯하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다. 


오즈의 마법사라는 미국 영화 속에서는, 뇌가 없는 허수아비는 지혜를, 심장이 없는 깡통 맨은 사랑을,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 한다. 이 모든 걸 오즈의 마법사가 줄 거라 생각하며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떠난 길 위에서 여러 고난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이미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지혜, 사랑, 용기를 발견하게 된다. 


2010년 설, 우리 가족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수술 후 퇴원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담당의사 선생님은 재정상태를 물으며 이런 환자가 집안에 있으면 3년 안에 가족들끼리 원수가 된다고 했단다. 


13년이 된 지금,  우리 가족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애달파하면서 살아간다. 많은 시간 아버지를 돌보아 온 엄마와 막내동생은 의사가 다 되었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전국 각지를 25번이나 여행을 했다.  84세 할아버지부터 12살 막내 조카까지 명절이나 생일이면 빠지지 않고 모여, 맛있는 음식을 놓고 온 가족이 나눠 먹으며 선물을 주고받는다. 


지난 12년의 매일매일은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쌓여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지혜와 용기와 그리고 가족에 대한 굳은 사랑의 존재를 밝혀주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속 예수의 메시지는 '나는 가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고 이후 내내 아버지의 침상 곁에는 예수가 앉아 우리에게 귓속말로 일러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사랑이 고난을 이긴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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