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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Jun 23. 2022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14

사후생 & 생의 수레바퀴

아버지의 기력이 계속 떨어지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이 드시는지 말씀도 통 없으시고 사람이 옆에 있어도 먼 곳을 응시하고 계시곤 했다. 늘 또렷한 눈빛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만 하시는 아버지한테서 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그 왜 말기 암환자들 방문해서 위로해주는 여자들 있지?” 

“호스피스요?” 

“응 그 사람들 좀 불러주면 좋겠어. “

“겁이 나세요?”

“응. 마지막에 고통이 심하다잖아.” 

“네. 알아볼게요.” 


몇 년 전 집 근처 문화센터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라는 수업을 들었던 생각이 났다.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했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에 대해 배웠다. 


로스 박사의 여러 저서들 중,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정리한 ‘사후생’이라는 책의 내용이 아버지께 위로가 되어 드릴 수 있을 듯했다. 


다만 죽음학이라는 개념이 우리 문화에서는 낯설고, 내용들도 다소 허구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에 로스 박사의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의 에필로그를 통해 그녀가 어떻게 인간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또한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를 바꾼 10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될 만큼, 서구 사회에서는 인정받는 학자였음을 알려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했다. 


로스 박사는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의 경계선을 드나들다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들의 경험을 종합해, 죽음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1.     죽음은 우리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어진 또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육체를 벗어버리는 과정이다. 

2.     영혼은 남아 잠시 동안 이 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며, 먼저 죽음을 맞이했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신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때 몸에 장애나 병이 있었던 사람들은 온전해진 몸을 갖는 경험을 한다. 

3.     곧 찬란한 빛을 만나며, 타인이나 신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인생의 장면 장면을 되돌아보며 삶을 되짚어 보는 과정을 거친다.


말기암에 걸린 어린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 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다.’


'죽음을 직면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에게서 얻은 지혜를 산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았던 그녀는 자서전 말미에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지구에 태어나 할 일을 다하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자신의 삶을 축복할 수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멋진 경험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내 바람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에'


그 사이 손흥민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으로 선발되고 대표팀 주장으로 외국팀과의 축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평생 열혈 축구 팬이신 아버지께서 축구시합을 챙겨보시더니 좀 힘이 나신 듯했다. 

“손흥민 아버지 책을 읽고 나니 손흥민이 그렇게 잘하는 게 더 대단하게 느껴져.” 

“저도 그래요."

"사후생에 나오는 죽음 이야기도 같이 읽었던 '뢰제의 나라'에서 주인공이 경험했던 내용과 비슷하잖아요. 그렇죠?" 

아버지와 함께 읽어 온 책들이 아버지와 내가 같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의 창문을 활짝 열어 준 것이다. 


아버지의 축구사랑을 쏙 빼닮은 외손자를 오랜만에 만나 한참을 축구 이야기로 꽃을 피우시더니 손자가 축구를 알아도 제대로 안다며 아주 기특해하신다. 

“그래 스코어가 어찌 될 것 같으냐?”

“음… 2대 1 정도로 승리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가 이길 것 같다는 믿음직한 손자의 예측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신다.  


“어제 보니 아버지 팔순에 사드린 난에 자줏빛 꽃 봉오리가 여럿 올라와있더라!” 아버지 때문에 마음 졸이시던 엄마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호스피스를 불러 달라던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성급하셨던 걸까? 


어쨌든 그 덕에 아버지와 나 모두 죽음이라는 과제의 답안지를 미리 엿보게 된 것 아닌가? 시험 날짜가 미뤄졌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내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사랑하며, 오늘을 사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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