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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May 06. 2023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24

불편한 편의점

남편이 아이들과 축구를 하다 넘어져 왼쪽 팔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는데, 한동안은 재활이 필요하다고 했다. 며칠간 종합병원을 드나들다 보니, 아픈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고 내 삶 속 감사할 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후 20년 가까이 건강해준 남편이 고맙고, 다친 곳이 머리나 다리가 아니고 왼쪽 팔이라 감사했다. 생각지 못한 수술과 입원에 목돈이 나가게 생겼는데, 자동차 보험 들 때 들어둔 상해보험이 도움이 되니, 몇 번이나 전화해 보험 들라고 권하던 콜센터 직원도 감사할 따름이다. 


C.S. 루이스는 '시련을 당할 때, 그때가 하나님이 확성기에 대고 이야기하실 때'라고 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누리면서도 감사하지 못했던 것들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한 손이 묶였으니, 옷 입을 때, 목욕할 때, 옆에 붙어 모자란 한 손이 되어 준다. 처음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성의를 다해 도왔는데, 두 주도되지 않아 성가신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엄만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았나.... 


게다가 엄마도 몇 년 전 빙판길서 미끄러지셔서 오른쪽 팔목에 남편과 같은 수술을 받으셨다. 얼마간 재활하신 후엔 아버지 간병에, 온갖 살림 다 하시고, 때마다 40kg씩 배추 들여다 혼자서 김치까지 다 담그셔 이집저집 나눠 주신다.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수술 후 처가에 들른 사위에게 마취 독 빠지는데 좋다며, 녹두죽이랑 미역국이랑 한 상을 차려주신다. 돌아올 땐, '그 장모에 그 사위! 쾌유를 빕니다!'라고 직접 쓰신 봉투까지 내미시니 머쓱해하는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남편은 한동안 다친 팔목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더니, 한 달쯤 지나 기진맥진한 와이프를 두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며, 분리수거 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선다. 장모님을 이어 슈퍼맨이 되기로 한 건가!



오랜만에 아버지께 읽어드리고 싶은 책을 찾았다. 책 제목은 ‘불편한 편의점’. 2021년 발행되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 책은, 작고 보잘것없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인생의 겨울을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봄날을 열어가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 따뜻한 말을 건네고, 믿어줄 때, 다시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헤아리고, 용기 있게 손을 내밀 때, 바로 그때, 내가 돕는 대상뿐 아니라 스스로가 더 환한 빛을 얻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편의점이 배경이 되는 데다, 다양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 낭독하는 내내 신이 났다. 아버지가 너무 재미있어하신다며, 엄마도 만사 제쳐놓으시고 파일 도착하자마자 먼저 들으신다고 했다. 


베스트셀러가 괜히 되는 게 아니다. 재미있으면서도 따뜻하고, 세상 속 빛을 잃은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이야기마다 Holy 하다! 


이런 게 진짜다! 상반된 것들의 만남, 높은 것과 낮은 것의 공존! 그게 최고의 스토리텔링이다.  


욕설을 섞어 이야기하는 인물이 나와 찰지게 욕을 해대며 낭독을 했는데 아버지가 책 읽다가 사람 망치겠다고 걱정을 하신단다. 나이 50살도 넘은 딸이 연기로 하는 욕도 듣기가 싫으신가 보다. 딸은 오로지 귀한 모습이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고지식한 애정이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낭독이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책에 나오는 옥수수수염차, 참치 삼각김밥, 참깨라면을 사가지고 친정에 들렀다. 선반에 놓인 바나나우유를 보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라 노란 병 두 개도 챙겼다. 


하나씩 하나씩 편의점 음식들을 아버지 눈앞에 보여드릴 때마다, "어 그게 바로 그 초콜릿이지?"  "아 그게 참참참이구나" 하시며 책의 내용과 눈앞의 음식을 연결 지으며 유쾌하게 웃으셨다.  


"바나나 우유 그건 나 좋아한다고 사 왔구나!" 나를 도와준 기억조차 고마웠다. 


아버지가 바나나 우유와 삼각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신하시는 동안, 나와 엄마는 옥수수수염차로 건배를 했다. 그렇게 우린 깔깔대며,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했다. 


함께 나눈 이야기의 힘이었다. 


책의 막바지에 이르자 아버지는 "내 생각엔 독고가 분명히...." 하시며 상기된 목소리로 결말을 예상하셨다. 대화하는 내내 아버지 특유의 명철함과 위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진정 아버지로 살아계신 순간이었다. 


"제가 아버지한테 이 책 읽어드린다고, 삼각주먹밥이랑 옥수수수염차 사서 웃고 떠든 이야기를 SNS에 올렸거든요. 그랬더니 병원에 근무하는 후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나중에 병원 환자들 위해 책 낭독회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꼭 한번 기회를 만들어보자네요. 


아버지랑 제가 그동안 같이 했던 순간들이 어쩌면 환자들한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데 쓰일 수도 있겠어요!" 


그 말을 듣고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이내 눈시울이 젖어든다. 붉어진 그 두 눈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내 얼굴을 꾹꾹 눌러 한참 동안 응시하신다. 


누군가 전동 침대를 조금만 빨리 움직여도 온몸에 전기충격이 오는 듯한 경련이 밀려와 신음하던 순간, 내 몸의 배설물까지도 남에게 맡겨야 하는 치욕의 순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절망의 모든 순간들이 영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계신 듯했다. 


뜻이 있다면 알려 달라! 하나님께 매달리고 계신 건가?


시련의 순간에 확성기로 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나와 아버지가 나누는 눈빛의 틈새로부터 새어 나와, 조금씩 아버지 귀를 울리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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