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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강 Nov 02. 2019

자카르타 일기

소설 '산자들'을 읽다

나흘간의 한국 출장길.


자카르타에서 한국으로 가는 야간 비행 7시간, 가끔의 난기류로 덜컹이는 비행기 안에서 쪽잠을 자며 책을 완독 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흔하게 접했던 비정규직 설움, 시위 현장의 악다구니, 치열한 취업과 입시경쟁, 무명 가수의 빈곤함 이야기.

90년대 초 IMF의 파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가시밭길. 많은 이들이 떠밀려 직장을 잃고 (책에서 죽은 자로 표현되는) 더러는 살아남아 왔습니다. 그 흔하디 흔한 삶의 세파를 책에서 다시 보여줍니다. 대다수의 우리는 책에서 묘사된 그 상황을 한두 가지쯤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공감합니다.

웃음기 없어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던 아르바이트생의 핑계에 같이 짜증을 내고, 시키는 일에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고 "그냥 자르자. 최 과장이 이 아가씨 하는 일 다 넘겨받고 그만큼 연봉을 올려 받으면 어때?"라는 사장의 말이 합리적으로 들렸고, 결국 회사에서 잘린 아르바이트생이 4대 보험 취득신고 미이행으로 회사를 고소할 수 있다고 하며 합의금을 받아내고, 경력증명서에 표기된 자신의 역할을 수정 요청하는 당돌함에 "잘릴 만 하구나"라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대기발령자들의 현실, "형님 같이 좀 삽시다" 라며 절규하는 죽은 자 들, 치열한 삶의 경쟁 현장 현수동 빵집들, 재개발과 재건축 법률의 허점에 남들은 다 받는 보상금 한 푼 건지지 못하게 된 세입자의 아픔, 아나운서 면접장의 숨 막히는 치열함, 정규직 입사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던 대외활동의 신, 짜인 규정들 속에서 불평하고, 화를 내고, 피곤해하던 소소한 하루 평범한 부부, 음원 스트리밍으로 누군가 자기의 노래를 들어주면 고작 1원도 안 되는 돈을 받는 지푸라기 개, 사학재단의 학교 내 비리 문제에 분노하던 어린 학생들과 잠시만 참으라던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책은 자르기(1부) 현장에서 싸우며 (2부) 버티어내는 (3부) 사람들의 익숙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언가 불편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울질하면 깃털만큼 가벼워 "잘릴만한 사람"이 있고, 어느 무거운 삶이 있어 "같이 살자"라는 절규에 눈시울이 붉어질까? [산자들]은 갈등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대안도 없고 희망찬 미래도 없이 그저 보여주고 끝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내가 다 아는 그 갈등, 내가 겪었던 불의 이야기.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단순히 문제를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입장의 면면들을 보여줌으로써 각자의 입장에서 삶의 단편적 문제만을 볼 수밖에 없는 독자들에게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모든 어쩔 수밖에 없는 입장. 어쩔 수 없이 자른 사람과 잘린 사람, 규정에 맞추어 일해야 하는 사람들, 철저한 시스템적 배분 구조.

그리고 그쯤에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난 어쩌라고?"
'밀려나지 않으려는, 죽은 자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함의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고 돌아보면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밀려나지 않으려 처절하게 삶을 버텨나가는 중인 것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기업의 회생을 위해서 불가피한 구조조정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기업의 생존을 위한 유연한 고용환경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불가피한"이라는 전제조건은 작게나마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는 안전장치로 남겨져 있어 다행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밀려나지 않으려' 버티는 것일까요? 노동시장의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게 되면 말마따나 사회적인 모든 안전장치에서 배제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웃사이더 (비정규 계약직 근로자)는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4대 보험의 혜택에도 소외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에 원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자본가의 횡포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법'은 산업사회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업 현장에서 자본가 (고용자)와 노동자 (피고용자)를 동일한 인격체로서 상호 권리와 이익을 논하고, 얻어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피고용자'에 한해서였습니다.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근로자외에 다양한 형태의 '계약'된 자들에게 노동법은 어떠한 정의도 내리지 않았고, 당연히 어떠한 권리 보장도 없었습니다. 낮은 임금,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계약관계, 그리고 사회적 복지 시스템에서 철저히 배제된 삶을 계약된 노동자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계약된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철저히 이용당해야만 했습니다. 자본가들은 언제든 쉽게 이용하고 쉽게 대체할 수 있게 계약근로자들의 지위를 어중간한 형태로 유지하기를 원했고,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계약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고용된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기존 시스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긴장된 권리와 의무관계)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공공기관에서 비정규 근로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많은 정규직 근로자들이 이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것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정규직 근로자가 되었는데, 저들 비정규 근로자들이 쉽게 정규직이 될 수 있느냐'며 분노했고, 비정규 근로자들의 노조 가입을 허락하여 모든 근로자들이 고용주에 대해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던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지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비정규 근로자들을 노조 밖으로 몰아내었습니다.

책은 삶의 치열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 갈등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지 '을'이 된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우리는 좁고 위태한 '제대로 된 삶'의 기회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며,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그 좁디좁은 제도와 규정들 안에서 자르고 싸우며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처럼 '세상에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한 사람이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다'라고 체념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간에 자르고 싸우도록 만들어낸 그 제도와 규정의 틀에 의문을 갖고 손을 잡을 것인가?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당신은 어쩌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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