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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향기 Oct 30. 2024

이런 나도 '나'지

옷걸이에 바지가 주르륵 걸려 있다. 그중 나의 픽을 당하는 바지는 없다. 바닥에 던져 놓은 고무 바지가 결국 오늘의 출근 의상이다. 옷걸이에 걸린 바지를 빼서 입어보려고 시도했지만 훅이 잠기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되어 가는 결혼 생활 동안 쌓은 건 삶의 지혜도 품 있는 육아도 일적으로 화려한 경력도 아니고 지방뿐이구나 하는 쓸데없는 자조를 한다. 정말 20년 동안 1년에 1킬로를 쌓았다. 이젠 다이어트도 몸무게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할 거 같다. 운동 신경이 부족해서 겁부터 먹던 나는 운동을 너무 싫어하고 하기 싫으니까. 확률적으로 앞으로도 운동은 하지 않을 게 뻔하다.


학교에는 전문적 학습공동체라는 것을 학년별로 운영한다. 연초에 학생 학습과 관련되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연수 활동을 계획하고 주어진 예산을 사용한다. 그저 연수 두세 번 정도 하면 끝나는 작은 예산이다. 마지막 연수로 만들기를 했는데 강사님이 구입한 원료가 업체에서 잘못 만든 제품이라 완제품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강사님이 다시 완제품을 만들어 교실에 두고 가셨다. 아침에 각 반에 배달을 가면서 교실을 둘러본다. 후배 하나, 동기 하나 빼고 다 언니들이 운영하는 교실이다. 하나 같이 모델하우스 같다. 깔끔하다는 표현 외에 더 쓸 말이 없다. 

그에 반해 내 교실은?

각종 프린터물과 검사해야 될 학습 결과물이 칠판 밑에 책상 위에 널려 있다. 환경을 생각한답시고 버리지 못한 이면지와 아이들이 찾아가지 않는 연필들도 책상 위아래에 보인다. 달력에는 해야 될 일들이 정돈되지 못한 글씨로 적혀 있다. 한 때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쓰지 않다 보니 과거의 필체는 없어지고, 늘 급한 마음에 할 일들을 대충 날려 적는 게 습관화되었다. 언니들처럼 나도 교실을 깨끗하게, 아니 정돈해야겠다. 더럽지는 않다. 먼지는 제거하고 바닥은 항상 아이들이 간 후 다시 청소하니까. 정돈이 안 되어 있다. 2층에서 4층까지 물건을 배달하면서 생각한다. 정돈해야지. 버려야지. 

하지만 무슨 환경주의랍시고 일말의 양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결국 종이는 함부로 못 버리고 있을 것이고, 전학생을 생각해 넉넉하게 준비해서 남은 여러 가지 종류의 학습 준비물도 못 버리며, 가끔은 이면지를 쓰겠다고 프린터기에 넣었다가 종이가 걸리는 사고에 짧지만 결코 짧지 않게 느껴지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소설을 읽고 있다. 소설의 재미를 잘 몰랐다. 늘 자기 계발서나 심리학 책만 읽고 있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내 글의 부족함을 더 느끼고 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아 내 글은 뭐지? 완전 초등학생 글이잖아.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나? 일기장에나 쓰지 뭐 하겠다고 브런치에 꾸역꾸역 글을 올리고 있는 거니?'

결국 또 잘나고 싶은 마음의 발동이다. 늘 뭔가 나은 것만 바라본다. 현재에 자족해야 된다 하면서도 그런 맑고 밝은 이야기를 하는 책들을 수도 없이 읽었으면서도 몸 따로 마음 따로다. 


뭐 그런 나다. 하지만 그런 나도 나다.

삶에 있어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나도 나고 뭔가 더 나아져야 된다는 강박을 가진 나도 나고, 육아보다 일을 중요시했던 나도 나고, 이젠 일을 등한시하는 나도 나다. 아이들과 너무 즐겁게 지내고 아이들을 좋아했던 작년의 나도 나고, 애들 생각만 하면 우울해지고 학교 오기 싫어지는 올해의 나도 나다.

살찐 나도 나고 날씬했던 나도 나다. 두 달 가까이 우울했던 나도 나고 어제 무슨 일인지 잠깐 밝아진 나도 나다. 내일부터 또 어두워질지 모르는 나도 나다.

교대생이 한 질문에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오늘은 나한테 말해 주고 싶다.

어떤 나도 나이니 나를 부정하지만 말자고.

책장에 꽂힌 책의 표지가 햇빛을 머금고 색이 바래어도 책 속의 글은 변하지 않는다. 외형이 변하고 늙어가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나는 그다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왔다 갔다 하는 나도 나일뿐이다. 


이런 나를 나라고 인정하는 나가 되고 싶다.

오늘도 이렇게 '~가 되고 싶다. ~해야겠다.'로 글을 맺는 나도 나다.

남편이 말한다.

"당신 글은 뭐해야겠다. 뭐 해야겠다 자꾸 그러는데! 그런 글은 재미가 없다고."


재미없는 글을 쓰는 나도 나다.

돌아오지 않는 사소한 것들. 큰아이의 웃는 어린 시절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메인배경- 법륜스님 책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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