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찐하게 탔다. 오전부터 부지런을 떨고 나니 맛있는 스콘이 먹고 싶었다. 동네 디저트 가게에 가서 스콘을 하나 사들고 와서 물을 올렸다. 커피는 진작에 눈뜨자마자 마셨으니까 홍차를 마셔보자. 홍차를 배운(?) 건 러시아 여행에서였다. 어디를 가도 홍차를 대접받았는데 그 맛을 알게 되었는지 비상식량으로 홍차티백을 한 움큼 가지고 다니면서 자주 마셨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 홍차 소비국이란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날이 쌀쌀할 때는 종종 이 텁텁하고 씁쓸한 티백홍차를 마신다. 이 카페인 중독자가 가끔 커피를 대신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액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영국 여행 고작 며칠 해보았다고 스콘과 홍차의 멋진 합을 즐기며 꼴값을 떨었다. 요새는 이런 걸 '페어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곁들이면 좋은 음식들을 페어링 한다고 하면서 무슨무슨 안주와 치즈, 무슨무슨 막걸리와 전 어쩌고 저쩌고를 소개하며 페어링 염병을 떨고 있더라. 온갖 신조어, 외래어, 밈이 난무하는 영상과 포스팅이 보기 힘들어져 나도 별수 없이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원래 항상 요새 애들, 요새 문화는 문제라고 해왔다. 아마 나도 전엔 분명 문제인 요새 애들이었을게다.
창문에 습기가 찬 건지, 밖이 안개로 뿌연 건지 구분할 수 없는 흐릿함에 답답했다. 예보대로 비가 오고 있었다. 동네친구와 산책을 하기로 했었는데 비가 올 것 같아 산책이 어려울 것 같다는 그의 코멘트가 있었기 때문에 비를 예상하고 있었다. 염증이 있었던 귓속도 말끔해지고 코벽이 덜 아린 거보니 컨디션이 제법 돌아온 것 같다. 감기도 감기거니와 밖에서 사람들과 왁자지껄 하하하 웃으며 놀 의욕이 없었다. 일찌감치 모든 일정을 다 취소했다. 지랄병이 도져서 괜히 또 거슬리는 점만 한가득 담아가지고 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요양한답시고 집에 머물다가 동네친구에게 콜을 했다. 아마 내가 먼저 산책하자고 한 건 첨이지 싶었다. 한파 속에서 감사하게도 뒷산을 같이 올라 한기를 만끽했다. 평소 같지 않게 몇 겹으로 꽁꽁 싸매고 땀까지 흘리며 산을 오르니 살 것 같았다. 마스크 안은 이미 콧물이 가득해서 코흘리개 아이처럼 코를 풀어제꼈다. 팽 코 푸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동네친구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나 참.. 내가 코 푸는 경력만 해도 몇십 년인데요. 이 정도는 애교에요.
무슨 산미가 어떻고 풍미가 어떻고 바디감이 블라블라 아프리카 어디에서 온 원두로 내린 줠라 고급진 커피도 먹어봤고 어느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바리스타의 커피도 다 마셔봤지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카페는 동네친구와 야외에서 마시는 '마호병' 커피다. 팔팔 끓는 물을 종이컵에 따라 카누 한 스틱 쭉 찢어서 타마시는 커피는 온몸의 해묵은 정체를 쑥 해소시켜 준다. 산책 가자는 말은 곧 이 커피를 마시자는 말. 한쪽 코는 휴지로 틀어막고 다른 한쪽코로 찬 공기를 들이키며 커피를 마셨다. 산길은 눈이 녹아서 다행히 미끄럽지 않았다.
드디어 새해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