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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6. 2020

혜민과 김수영


혜민 바람이 불고 있군요. 긍정적 열풍이 아니라 비난과 폄하의 뜨거운 바람이.


슈퍼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오래전 서점에서 그의 책을 펼쳐본 적이 있지요. 몇 줄 읽다가 다시 전시대에 돌려놓았습니다. 혼곤한 개인적 위안으로 세상 문제의 외면을 유혹하는 전형적 사탕발림이었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 이런 책이 폭발적으로 팔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워낙 지치고 다쳤기 때문이지요. 당이 부족하면 몸에 힘이 쭉 빠집니다. 그럴 때 달콤한 솜사탕 같은 걸로 일시적이지만 기운을 차리는 것이 뭐 그리 나쁘겠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삿된 욕망과 세속적 영광에 대한 초탈, 그 결과로서 무소유가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이지요. 그렇게 보면 혜민의 행적은 욕을 먹어도 쌉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분명합니다. 세상에 대한 관조를 내세우면서 기실은 돈을 축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영악하게 기생한 그의 언행불일치 때문이지요. 그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노출하는 수행자로서 자의식 부족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확히 그 지점에서 저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김포에서, 분당에서, 세종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미친 듯이 오르는 집값이 떠올랐습니다. 풍선처럼 부푼 투기자금의 광기가 (서울에서 단물을 한껏 빨아먹은 다음) 부동산 규제가 덜한 지방을 휩쓸고 있는 거지요. 예를 들어 대구 황금동의 32년 된 아파트 가격이 몇 년 만에 6배를 뛴 14억원이라 합니다.


취업 못해 택배업체 상하차 알바 뛰어든 젊은이들이 일당으로 받는 돈이 6만원 정도. 기초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든 수입입니다. 자그마한 아파트는 그저 환상일 뿐 몸 하나 편히 쉴만한 좁은 방 구하는 것도 언감생심인 것이 현실입니다. 개인 개인의 일상을 압도하는 명백한 구조적 장벽이 눈 앞에 솟아있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서, 마치 주범처럼 혜민을 욕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싶은 자문이 든거지요.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는 과도한 외부자극을 극복하는 방법은, 원인을 제거하거나 스스로를 적응시키거나 2가지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혹시 후자를 택한 것은 아닐까 싶었던 거지요. 자본과 의식과 문화의 이 압도적 양극화에 지쳐 정작 분노의 촛점을 다른 곳에 돌리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혜민은 분명히 욕먹을 행동을 했지요. 그가 종교인이자 수백만권의 책을 판매한 영향력 큰 작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사회적 인기라는 재화를 꽁지돈 삼아 눈덩이처럼 탐욕을 부풀린 그의 행적이 칭찬받을 수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스님도 우리네 세상의 메커니즘에 교묘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한 존재일 뿐 아닌가. 그 너머에 이런 현상을 만들어낸, 정신차리고 지켜봐야 할 다른 대상이 있지는 않은가 자꾸만 생각이 옮겨가는 겁니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라고 말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는 3가지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식과 생산의 삶, 누리고 즐기는 삶, 그리고 관조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2020년의 우리들, 특히 젊은이들이 세 가지 삶 중 과연 어떤 것을 감히 꿈꿀 수 있을까요.  


이 고삐 풀린 부동산 광풍 속에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갈아 넣어야만 꿈틀꿈틀 움직이는 시스템 안에서 나도 지금 어딘가 옆으로 비켜서 있는게 아닌가.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는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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