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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O Aug 12. 2020

돈 빌려준 놈이 굽신거리는 법이다.

채무자의 비위맞추기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아니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유한 집의 자식이었고 항상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600만 원만(!!) 빌려달라고 급하게 연락이 왔다.


이거 보이스피싱의 일종인가?


본인임을 확인하기 위한 유도 질문을 시작해 본다.

그의 특유한 문자체가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미안해. 그렇게 됏어”


항상 쌍시옷을 온전하게 적지 않는 그다.


알겟어.

먹엇어.

다왓어.


그가 맞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전화를 바로 걸어보지만 전화는 받지 않는다. 문자만으로 돈을 빌려 줄 수 없지 않은가.

600만 원이 적은 돈도 아니고.




급하게 구할 수 없는 돈이라 미안하다 거절한 후에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성급하게 거절했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알고 지낸 수 년의 세월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 아닌가.


몇 날 며칠을 마음앓이를 했더랬다.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절을 하는 것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줄이야.


나는 결혼 전에 증권회사에서 7년을 일했다.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물론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돈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돈 거래는 '신뢰'라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는 믿지 않는다.

돈 거래는 철저하게 법이 개입하여 보장하는 채무-채권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친한 지인이 힘들어 하며 손을 내밀고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우정 테스트라도 하듯이.

돈 따위(?)로 사람간의 우정을 가늠할 수 있겠나 싶지만,

그럴 수 있겠더라.


"너 한테만은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미안하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오죽하면 나에게 돈 이야기까지 꺼냈을까.


신랑과 상의 끝에 아이 적금 통장은 지금 당장 쓸 돈이 아니니 급한 사람 돕고 보자며 합의을 보았다.

시어머니 환갑 기념으로 처음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모은 돈 이기도 했다.

3달만 쓰고 돌려준다고 했는데 그때 가서 못 준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안 빌려주고 마음이 불편한 것 보다는 이 무거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거절 후에 연락하기도 껄끄러웠던 그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해 본다.

600까지는 못 되더라도 급한대로 500을 준비했다고.

바로 답장이 왔다.

보내 준 계좌번호로 돈을 송금했다.



조금 씩 5년을 모은 돈인데, 10초도 안 걸리는 시간에 타인(?)의 계좌로 옮겨가다니.

남은 잔고의 0원이 이토록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할 줄이야.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저축이라고는 아이 통장에 몇 푼 씩 넣어 주던 게 전부였다니.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친정 엄마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아등바등 살고 있었는데.


내 코가 석자.


누가 누굴 돕는 다는 것인지.


그에게 내가 필요한 날에 되돌려 주겠노라 확답을 듣고서야 나는 타의에 의한 본의의 채권자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돈을 돌려 받기로 한 날이 되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연락하는 것은 보기에 안 좋으리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연락이 없었다...


다음 날 연락을 했다.

빌려 준 돈을 받기 위해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메시지를 보냈다.


「 더 오래 못 빌려줘서 미안해. 쓸 목적이 있었던 돈이라... 재촉해서 미안해. 오늘 줄 수 있어?」


달라고 재촉해서 미안하다..

더 오래 못 빌려줘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답장이 왔다.

오늘은 안 될 것 같고 내일 보내주겠다고.


이제부터 안달이 나는 사람은 내쪽이다.


정말 당장 써야 하는 돈인데 이거 어쩌지?

설마 안 주겠어?

정말 안 주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순간이다.


다음 날에 연락이 없다.

저녁이 다 되어서 또 다시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 자꾸 재촉해서 미안해. 당장 써야 해서. 지금 보내줄 수 있어?」


잠시 후 400만 원이 입금되었다.

그리고 남은 100만 원은 다음 주에 준다고 한다.


그의 상황을 알고 있다.

좋지 않다는 것도.

힘들다는 것도.

그렇다고 TV에서 처럼 선뜻 돈을 빌려주고 몇 년이 걸리든 여력이 되면 갚아라 할수는 없었다.

나는 육아를 하며 대출 이자라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 강사 워킹맘이다.

지인의 안위를 위해 내 가족을 힘들게 할 수 없다.


나는 이기적인 아내이고 엄마이고 사람이다.


남은 돈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우리 사이에 채무 관계는 더 이상 갖지 말자며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 미안하다...."


그리고는 남은 돈을 받았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웠고

빌려준 돈을 받게 되서 기뻤으며

그가 아직도 힘든 상황임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기회로 나는 알게 되었다.


돈은 안 받아도 되는, 없어도 되는 것만 빌려줘야 한다는 것을.

빌려준 돈을 받는 사람이 이렇게나 마음 고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친한 사이 일수록 돈 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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