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사서 한 생각, 아 인생이여
이번 글쓰기 수업 주제는 지금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문장에 대해 써보기였다. 2주 내내 어떤 문장을 써야 할지 고민만 하다 수업 전날이 되어서야 베란다에 있는 책장을 찾았다. 책장의 책들을 눈으로 읽어 내릴 때마다 ‘그래, 이 책은 이래서 좋았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마땅히 쓸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몇 번을 훑어보다 내 시선이 좁고 기다란 책 한 권에 꽂혔다. 제목은 류시화 시인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이 책의 제목을 읽는 순간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득한 싱가포르 우체국 의자에 앉아있다. 받아 든 택배 상자 안에는 정성스럽게 리본이 묶인 불량식품 한 봉지와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엽서 한 장, 그리고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얼마 전 친구가 전화로 나에게 꼭 찾아서 보내주고 싶다던 그 책을 드디어 구했나 보다. 이미 절판되어 찾기 힘든 이 책이 도대체 뭐라고 그토록 보내주고 싶었던 걸까.
그 시절 나는, 싱가포르에서 한량 같은 삶을 보내고 있었다. 말이 한량이지 매일 똑같은 시간표로 흐트러짐 없이 집과 카페를 오가고 있었다. 졸업 후 해외 취업을 해보겠다며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자기소개서만 들고 싱가포르에 갔다. 그리고 운 좋게 로컬 사무소 취업에 성공했지만 1년도 안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 주변에는 힘이 들어서, 더 좋은 곳으로 가려고 그만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fire를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사실 힘이 들었다기보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냥 어떻게든 그 시간을 모면하고 싶었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라고. 제대로 슬플 수도 내 실패를 인정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둔 바로 다음 날부터 매일 카페로 가서 포트폴리오를 다시 다듬고, 자기소개서를 고쳐나갔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끔거릴 정도니 내 인생에 있어 여전히 아픈 손가락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 시기에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연결된 것처럼 내 행운을 빌며 이 책을 나에게로 보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이 책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얼굴흰사람(백인)들에게 했던 연설을 엮은 책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어 자연은 내 모든 몸짓에 화답한다는, 그래서 영혼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나는 친구에게서 받은 이 책을 단지에 말을 눌러 담듯 천천히 읽으며 마음을 붙드는 문장에 조심스럽게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밑줄 그은 문장들을 나만이 들리는 소리로 여러 번 읽었더니, 흐트러지지 않으려 무너지지 않으려 지키고 있던 마음이, 요가를 하듯 조금씩 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으로 꽉 조여있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요즘도 나는, 늦은 밤 세상이 내 목소리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고요해지면 이 책을 꺼내어 밑줄 그은 구절을 읽어본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책임을 져야 하며, 생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일이다. …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 줄곧 떠오를 경우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라. “난 이런 생각들을 선택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뒤 그 생각을 혼자 내버려 두면 곧 사라져 버린다.
-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나는 내가 잘 해내지 못했던 일이나 실수했던 일들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면,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해대며 자신을 마구 상처 내는 버릇이 있다. 그러고는 그 시기를 모면하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하며 그 시간이 지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떠오르게 되어있다. 그럴 때면 이 한마디면 된다.
난 이런 생각들을 선택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