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사서 한 생각, 아 인생이여
예전에 잦은 야근과 밤샘으로 힘에 부칠 때면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빨래처럼 걸쳐져 있고 싶다, 빨래처럼 널려있고 싶다고. 온몸의 힘을 쭈우욱 빼고 중력에 내 몸을 맡겨 널려있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든다. 빨래처럼 널려있는 것이 정확히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면, 방바닥에 있는 빨래는 그냥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느낌이라면, 널려있는 빨래는 스테인리스로 된 건조대가 든든히 받쳐주어 편안하고 안전하게 널려있는 느낌이 든다고 하겠다. 나에게 빨래는 어떠한 압박(?)으로도 자유롭고,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위로를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빨래가 된 느낌이 든 적은 초등학교 때 시골 할머니 댁에 갔을 때였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꽤 많이 남은 방학 숙제 때문에 조급한 마음으로 짐을 싸 들고 갔었다. 숙제한답시고 집 뒤쪽으로 난 툇마루에 앉아 상위에 탐구생활을 쫙 펴놓고 앞을 바라보니, 초록으로 뒤덮인 산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도무지 숙제하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아 멍하니 한참을 숲만 바라봤다. 그 숲을 바라보는 동안 숙제로 조급했던 마음도 잦아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 순간이 너무 편안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지만, 눈을 뗄 수 없게 계속 바라보게 하는 그 숲에 뭔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뿐. 그때 이후로 난 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쎄 중 하나인 고시 공부하러 산속 절에 들어가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 빨래가 된 적은 작년 겨울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이직한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새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연말에 긴 연휴가 생겨서 마음도 추스를 겸 제주도로 떠났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라 내가 좋아하는 곳들 위주로 찾아다니다 ‘윈드스톤’이라는 작은 독립서점으로 갔다.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 골라 자리에 앉으니, 때마침 주문한 아몬드 라테가 내 앞에 도착했다. 커피를 한 모금하는 순간,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고, 조금 전까지 재미있게 본 책 따위도 생각나지도 않고, 오롯이 커피와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원초적인 감각만 존재하는 순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 그런 순간이 하루에 몇 번이나 올까. 이런 생각이 드니 회사에서 겪은 일 따위는 딴사람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빨래처럼 널려있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남에 등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인간과 인간의 체온이 맞닿아 있는 느낌은 사람의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나는 아직도 회사 일로, 사회생활로 이리저리 치이고 힘에 부칠 때면 빨래처럼 널려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나는,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보았던 초록의 숲도 제주도에서 맛보았던 아몬드 라테도 아닌, 인간 건조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직좌 할 수 있는 순간, 누군가가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느낌, 아무 생각 없이 기대 있다가 상대의 온도와 나의 온도가 같아질 때, 나는 비로소 말로는 얻지 못할 위로를 받은 빨래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