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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 Jan 22. 2022

불안의 담은 캐리어 by 이레이다

사서 한 책읽기 #002

주인공 희정은 학창 시절에, 스페인과 영국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여기저기 마구마구 뻗어나간다.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계속에서 읽어나간다. 이내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희정을 중심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하는 것보다 희정과 희정의 주변인(희정의 엄마와 아빠, 친구,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남 사람들, 희정의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남자 친구까지)과의 관계에 집중하며 읽는다.

희정과 그들과의 관계는 눈에 띄게 볼드 처리된 대화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의 말만 들어달라는 그녀의 엄마와의 일방적인 관계부터, 자신의 말도 하지 않고 희정을 말도 들어주지 않는 아빠와의 닫혀있는 관계, 희정을 무조건적으로 안아주는 할머니와의 관계. 이러한 관계 속에서 희정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에게 불필요한 관계를 끊고 서로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와 관계를 이어나간다. 한층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관계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나간다.

결국 모든 관계는 쌍방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호의를 보여도 상대가 반응하지 않으면 관계는 맺어질 수 없다. 관계의 가지치기와 발전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희정의 모습에서 희망을 엿본다. 희망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 작은 희망을.

이야기의 마지막, 희정이 불안을 담은 캐리어에서 찾은 빈 공간은 영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있었는지도 모른다. 희정의 눈에 지금 그것이 띄였을 뿐. 불안을 담은 캐리어에서 각자가 찾은, 작지만 뭔가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빈 공간이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려는 그 이유가 아닐까.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 끝없는 그의 물음에 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제 작가노트는 한줄도 쓰지 못한 채 와인 1병을 비웠고 오늘도 술만 마실 것 같아서 나왔다는 고백까지 하고 말았다. (…)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그런 날도 있는 거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휴지는 책상에 쌓여갔고 가짜 피부색과 가짜 립스틱은 눈물로 지워졌다. 그는 리무버였다.


* 길거리 화가가 그렸던 무채색엔 평화가 없었고, 뽀족한 입사귀의 가로수 그늘에도 따스함보다는 서늘함이 묻어 있었는데, 내 마음엔 출처 모를 따스함이 피어나고 있었다.


* 내 자유 시간엔 항상 술과 스케치북, 오일 파스텔의 3종 세트와 함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시간을 보내는지, 내가 잠들지 않은 16~18시간 가까이는 타인들의 삶을 시청하는 데 보냈다. (…) 삶은 각지 다른 자연물과 인공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풍경이 되어 개인의 삶을 만드는 순간이 되었다.


* 달력을 보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뭘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을 끝낼 때가 왔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캐리어를 꺼냈다. 그림을 챙기고 옷가지를 넣고 나니, 다시 빈 공간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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