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은 Nov 16. 2023

비교

자신과의 관계 #6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단연 '비교'하는 말이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들었던 형제와 비교였을 테고 십 대 때는 친구와 끝없는 비교로 인한 절망이었을 거다. 20대 때는 나보다 나은 동료 혹은 접점도 없는 누군가와 끝없이 비교하며 좌절 했을 거고 30대 때는 가정을 꾸리고서 다른 집과 적잖은 비교로 절망했을 것 같다. 40대 때가 되어서 다를까. 여전히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며 자신에게는 없는 것 투성인 삶에 빈곤한 마음만 가득할 것 같다. 50대가 되면 혹시라도 좀 여유가 생길까 싶지만, 글쎄. 주변을 보면 빈둥지를 지키는 자신을 비관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언제나 자신은 불행을 독박 쓴 것처럼 느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화려하기만 한 것 같다. 행운의 여신은 자신에게만 없는 것 같다. 행운의 여신도 차별하며 한쪽으로 몰아주는 것인지 언제나 자신은 제외 대상이라 고고 체념하게 된다. 절망의 수레바퀴. 나열하면서도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찝찝하다. 불평만 하고 희망은 없는 불평불만의 끝판왕의 푸념처럼 느껴진다. 쓰는 나도, 이 글을 보는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이런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진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 뫼비우스 띠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비교 때문에.


비교는 눈 감는 날까지 계속된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는 한 말이다.  


누굴 대상으로 비교를 가장 많이 할까?



흔하디 흔한,  "엄마 친구 OO는 말이야~"가 귓가에 맴돈다. 또 다르게는, "옆집의 OO는 말이야~"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막상 자신이 비교를 당하는 건 싫어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또 다른 누군가를 비교하며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비교 상대가 있다는 건 비교할만한 기준이 생겼다는 걸 말한다. 그러나 비교의 기준은 절대불변이 아니다. 다. 기준은 대상에 따라 빠르게 바뀌고 변한다. 비교가 끝없이 만들어지고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교할 기준, 비교할 대상, 비교할 내용은 지치지 않고 계속 만들어진다. 아무리 애써도 결코 도착할 수 없는 종착점과 같다. 비교 대상과 겨우겨우 같아질 즈음엔 또다시 새로운 비교 대상이 등장할 테니까.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 같이.


끝없이 비교하는 삶은 괴롭고 공허하며 비루한 마음을 갖게 된다. 매 순간 힘겹게 달리고 또 달렸는데 끝이 안 보이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자. 비교를 했던 나의 가족과 친구들, 동료, 옆집의 누구누구들... 나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비교로 인해 그들과 멀어졌고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비참하게 느껴졌던 순간들이 자신을 괴롭혔을 거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지지하고 응원하며 잘했다고 칭찬하는 순간들마저도 놓치고 스스로를 패배자라로 여기며 질책만 했던 어두운 날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결국 비교는 자신의 삶을 파국으로 이끄는 첫걸음이다.

비교하는 사람이 만족할 때가 있을까? '조금만 더', '좀 더 괜찮은'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이미 만족을 모르는 비교 중독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이라는 것은 뭘까? 기준도 없이 계속해서 '좀 더'를 외치는 것뿐이다. 뭔지도 모르고 지금보다는 낫다고 막연하게 말하는 사람들. 비교 대상은 자신이 원하는 가치보다는 타인들이 모두 좋다고 칭송하는 것들일 게 뻔하기 때문에 '좀 더', '더 나은'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따라잡아도 끝이 나지 않고 행복은 만질 수조차 없는 것이다.


비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잡기만 하려는 거다. 그것은 마치 '눈 가린 채 달리는 경주'와 같다. 결승점이 어딘지도 모른다면 달리기를 끝낼 수도 없는 거다. 이런 경주 생각만 해도 숨 막힌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쫒는 것이라면 분명 자신도 만족하고 행복을 줄 것만 같은 마음은 가짜다. 진짜는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남들이 다 가치가 높다고 하는 것이(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과연 가치로운지.


비교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대상과 기준이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어릴 적 운동장에서 줄을 설 때 선생님이 기준을 정하고 '기준'이라고 크게 외치라고 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기준'이 된 아이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래야 줄이 일정하게 맞춰지니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비교는 절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그럴듯한 합리화로 비교를 부추기지 것을 멈출 때다.

"OO처럼 이 시험만 합격하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 될 거야."

"OO처럼 돈이 많으면 나는 행복할 거야."

"OO처럼 사랑받으면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거야"

비교하는 '그들처럼' 된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 나는 그와 다르니까.


누군가를 떠올리며 비교하기보단 자신이 어떨 때 행복을 느낄지에 대해서 더 찾아보는 게 행복 찾기의 첫 단계다. 자신을 알아가는 재미,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라는 것에 장담할 수 있다. 결승점이 어딘지도,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모를 레이스는 이제 그만 뛰어들자. 이미 충분히 행복의 재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자.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재료를 갖고 무엇을 요리할지 상상만 해도 행복레시피가 만들어질 테니.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 때다. 그 어느 것보다 맛 나는 삶. 누구라도 가능하다.


작가의 이전글 편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