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이 흉악범이 되는 나라
[천구](天狗:티엔꼬우)는 극 중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전기도 아직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은 중국 산간벽지 마을에서 펼쳐지는 다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 유지 삼 형제가 총에 맞아 죽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 공안이 이 벽지마을로 사건 해결을 위해 급파되고 살인사건을 하나씩 파고들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과연 누가, 왜 이 끔찍한 살인사건을 일으켰을까. 영화는 공안이 탐문수사를 펼치는 장면과 제대군인 이천구(李天狗)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까지 상호 교차편집 형태로 진행된다.
이천구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에게서 영웅대접을 받는다. 이천구는 군대에서 부상을 입고 명예 제대한 용사. 한쪽 다리를 절지만 상부의 배려로 이 마을 산림보호원으로 배치받은 것이다. 촌장을 필두로 마을 사람들은 이천구를 열렬히 환영한다. 한 마을 노인은 그의 영웅적 도래를 찬미하는 노래까지 부를 정도이다. 이천구는 순간 감동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천구 가족-아내와 아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준다. 가재도구며 닭, 염소까지.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분에 넘치는 호의의 진정한 이유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구닥다리 총을 거머쥐고 다리를 절며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산림을 순찰하던 중 광범위하게 벌목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불법으로 산림을 벌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공 씨 집안 형제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공 씨 삼 형제는 거의 토호세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경제권,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듯했다. 이천구는 결코 이들 무리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공 씨 삼 형제와 마을 사람들의 보복은 철저했다. 공동우물에서 물 긷는 것을 금지시킨다. 전기도 끊어버린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메마른 산간마을에서 살아남는 법은? 이천구는 마을 공판장에서 캔 콜라를 사기 시작한다. 그것도 비싼 값에. 콜라로 세수하고, 콜라로 밥을 짓는다. 물론 촛불을 켜놓고 말이다. 공 씨 삼 형제는 좀 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협박하고 아내에게 위해를 가한다. 참을 만큼 참은 이천구. 이천구에게 마을 사람이 집단 린치를 가하자 그의 본능적 생존 의식이 살아난다.
영웅무루(英雄無漏: 영웅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 영화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장평(張平)의 1991년도 소설 [흉악범](凶手)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장평의 많은 작품들이 잇달아 영화와 TV드라마로 옮겨졌지만 원작자는 그들 작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천구]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는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조금 권위가 있는) 베이징대학생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타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대상을 타기도 했다.
소설과 영화는 중국이 개혁개방과 함께 경제제일주의(向錢走)로 달려가면서 산간벽지에 국가의 영도력이 닿지 않는 저들만의 폐쇄적 경제방식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울창한 삼림의 나무는 해마다 쑥쑥 자랄 것이고, 그 나무를 베어 돈 버는 집단이 있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담합, 공모, 묵인하는 것이다. 지역 토호세력의 발호는 이미 중국에서는 국가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원리원칙에 충실한 퇴역군인이 등장하여 갈등이 고조되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힘은 절대적으로 이천구 역을 맡은 배우 부대용(富大龍,푸따룽)의 공로이다. 다리를 저는 리얼한 장애인 연기는 물론이고 어눌함 자체가 그 배역의 피동적, 극한적 처지를 너무나도 잘 대변해 준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아내의 목간통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천구는 성불구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젊고 활달한 아내의 처지가 더욱 극적으로 부각된다. 마치 [차탈레 부인의 사랑] 같은 문학적 긴장감을 안겨준다.
이 영화는 바보 같은, 우둔한 이천구의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종말로 치닫게 된다. 극 중에서 마을의 실력자 공 씨 형제가 이천구를 술집에 불러 향응을 제공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천구가 갑자기 일장연설을 한다. 군에 있을 때 우리 대장이 그랬다. “동지들. 저 앞의 산이 누구 것이지?” 그럼 사병들이 “중국 것입니다.”라고. “저 산의 한 치 땅, 한 그루 나무가 모두 우리 중국 것입니다.”라고. 지극히 주선율 다운 영화 대사이지만 본질적으로 중국적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자기가 지킬 조국이 있다는 사실과, 그 조국의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결코 사적으로 없애버릴 수 없다는 불요불굴의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주의적 영웅관일 수도 있지만 이 소박한 영화에서는 그것보다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한 개체의 힘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의 감독은 척군(戚建 치지엔)이다. 장예모와 진개가와 같은 북경전영학원 감독과 출신으로 이른바 ‘5세대 감독’에 속한다. 장예모나 진개가의 휘황찬란한 길을 달려온 것에 비해서 여전히 소박하고 진실된 영화에 매달리고 있는 셈이다.
외딴 벽지마을 전체 주민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고 사적인 방어를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샘 페킨퍼 감독의 걸작 [지푸라기 개](Straw Dog)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에서는 프랑스 영화 [마농의 샘]과 연결 짓기도 한다. 두 영화 다 명작이니 챙겨보시도록. 하나 더 이소홍 감독의 [붉은 가마]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2007년 서울에서 열린 CJ중국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