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출장을 가거나, 한 달이 넘는 일정의 트레킹 여행을 떠날 때 챙겨야 하는 물건들이 많다. 환경보호 정책에 따라서 일회용품 사용이 제한되면서 집 밖을 나서면 일단 세면도구는 필수로 챙겨야 하고 여행 목적이나 기간에 따라서 갈아입을 옷가지나 그밖에 갖고 가야 하는 품목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나이를 좀 먹었다면 누구나 챙겨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약이다. 정확하게는 복수형으로 '약들'이다. 나이 50을 넘긴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로 매일 복용하는 약이 한 가지 이상은 있기 마련일 테니 말이다. 성인이니 성인병이 있는 경우가 많다. 성인인데도 성인병이 없다면 축복이고 어마무시한 자기 관리자이다. 성인병이 없는 사람은 약 없이도 중장년 시기를 보낼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음식으로만 보충하기에 어려운 필수 미네랄과 비타민이 있기 마련이어서 약이 아니라면 건강보충제라도 챙겨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매일 아침 피니스테리드 한알, 스타틴 한알, 비타민제 한 알을 먹는다. 피니스테리드는 벌써 복용해 온 지가 10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탈모방지약이다. 이 약을 먹은 후로 탈모증상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계속 유지하려면 하루에 한 알을 먹어야 한다. 스타틴은 콜레스테롤 방지 약인데 술을 끊고 달리기를 한 이후로 치수가 완전히 전상으로 돌아왔음에도 용량을 줄이긴 했지만 역시 하루에 한알씩 계속 먹고 있다. 오래전 방탕한 생활을 할 때 고지혈증 판정을 받은 이후로 스타틴을 복용하라는 주치의사의 권유를 계속 따르고 있는 것인데 약을 끊으면 다시 치수가 올라가지 않을까 염려도 되고 하루에 좁쌀만 한 약 하나 챙겨 먹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그냥 복용을 이어가고 있다. 비타민제는 여러 가지가 섞인 종합 비타민인데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해 초부터 아내와 함께 석 달 치를 구입해서 먹고 있다. 하지만 복용 후 달라진 것이라고는 샛노란 오줌색깔 말고는 없어서 사놓은 약이 다 떨어지면 그만 먹을 생각이다. 종합비타민과 정관장 홍삼은 잊을만하면 누가 선물을 해주거나 스스로 사 먹기도 하는데 효능을 체감한 적은 없다. 그냥 나이 먹은 값이다 생각하고 가끔씩 먹어준다.
나는 금주한 지 2년 반 가까이 되었고 20년 이상 금연자이며 격일로 10km씩 달리고 그 사이날에는 근력운동을 빠뜨리지 않고 있으니 나름 평균 이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건강검진을 받아도 이상 소견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내 또래의 친구들과 장기 여행을 떠나거나 동료 교수들과 출장을 다녀보면 이들이 갖고 온 약 보따리가 어마어마한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으며 업무수행이나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이들이지만 저마다 은밀한 약봉투를 한 꾸러미씩 갖고 있다.
이들이 가장 자주 복용하는 약은 혈압약이다.
나이가 들면서 노화현상으로 혈압이 상승하게 되는데 여기에 더해서 짠 음식을 즐기거나 체중이 무거우면 심장은 힘들어한다. 한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고혈압인데도 약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 같으면 살을 빼든 지 그게 어렵다면 약이라도 챙겨 먹을 것 같다.
두 번째로 흔한 약은 나도 먹고 있는 스타틴으로 고지혈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먹는다.
계란과 기름진 음식이나 어패류, 갑각류가 고콜레스테롤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대개는 유전적 특징으로 몸속 장기에서 콜레스테롤을 필요이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혈관에 찌꺼기가 끼게 만들어서 혈액순환에 방해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과 고기, 새우, 오징어는 계속 먹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스타틴을 먹는다. 한때 80kg에 육박했던 체중이 65kg으로 줄고 술도 마시지 않게 되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체중이 빠지는 동안에도 콜레스테롤 약을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타틴 복용을 중지하면 수치도 다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의사도 계속 복용을 권하고 있어서 지시를 따른다.
여기까지는 감당이 가능한 약과 증상인데 '당뇨'가 있다면 갑자기 삶의 질이 확 떨어지게 된다. 주사기를 갖고 다니며 스스로 배에다 인슐린제를 투약하고 식습관도 당뇨식으로 바꿔야 해서 식당에서도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심한 경우 자신의 밥을 따로 싸갖고 다니는 경우도 보았다. 아침마다 공복 혈당을 체크하느라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내야 하는 것도 성가시다. 그래도 두 눈을 부릅뜨고 수시로 확인해야 나중에 발을 자르거나 눈이 멀게 되는 당뇨합병증을 막을 수 있으니 인생이 비참해진다.
여기에 추가하여 나는 밤마다 지병인 수면장애 때문에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잠 오는 약'을 먹는다. 대개는 진경안정제와 우울증 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 년 전에는 졸피뎀도 처방해 주었는데 지금 다니는 신경정신과 의사가 너무 센 약이라며 다른 약으로 바꿔주었다. 신경정신과 약은 최대 3주 치만 처방해 주기 때문에 3주 이상의 여행을 떠날 때는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해서 좀 더 긴 분량의 약을 특별 처방받기도 하는데 대개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여서 영문처방전도 받아서 통관 시 지참해야 한다. 특정 약물을 규정이상 많이 휴대하고 있으면 입국심사 시 압수당하거나 통관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약을 먹는 것은 즐겁지 않다.
약을 매일 먹고, 그 약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면 부담되고 싫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평소 복용하던 약과 같이 먹어도 되는지 고민이다. 그래서 의사를 만날 때 죄인이 경찰관 앞에서 범죄를 자백하듯 나는 이런 약도 먹고 저런 약도 먹고 있다고 순순히 불어야 한다. 약을 먹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약을 이미 먹고 있다면 개수를 줄이거나 용량을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약 먹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