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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빠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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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Aug 19. 2024

술 마시려고 올랐던 산, 맥모닝 먹으려고 뛰는새벽 러닝

알코올중독자로 살았던 시절, 중년이 된 나는 당뇨에 고혈압, 심혈관질환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던지 악착같이 산을 올랐다. 처음에는 동네 뒷산이었지만 익숙해지고 나서는 산이 많은 나라에 태어난 걸 감사해하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고 오래지 않아 100대 명산이나 지리종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산에 오르고 보면 나 같은 부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겉으로는 산이 좋아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산에서 마시는 술을 좋아한 것이고, 하산한 뒤에 산자락 주변에 의례히 있기 마련인 먹자골목 한 귀퉁이에 퍼질러 앉아서 개선장군처럼 대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산이었지만 누구에게는 수영이었고 누구에게는 배드민턴이었다. 

중년 남자들이 즐겨하는 각종 취미 생활은 그 범위나 레벨이 무궁무진했지만 무엇이 됐든지 취미의 끝에는 응당  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러닝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네마다 러닝크루가 생겨나고 새벽부터 강가에서 또 운동장 트랙에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술을 마시지 않는 중년 남자는 가수 션과 이영표 선수뿐인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 달리기를 지도해 주고 힘들 때 리딩을 해주던 내 달리기 동료들도 대회를 마치거나 주말 아침 달리기 모임을 마치고는 시원한 맥주 한잔 기울이는 뒤풀이를 갖는 듯했고, 아예 대회를 준비할 때는 달리기를 마친 후 대회 부스에서 마실 막걸리와 맥주 등 주류를 챙겨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다.   

안나푸르나 서킷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등 히말라야를 두 번 오르면서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을 떠올리라고 하면 그중의 하나는 바로 이 어려운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서 마시게 될 네팔 산 차가운 '에베레스트 맥주' 한 잔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공룡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를 오를 때 내 눈에는 설악의 산그리메도 보였지만 홀로그램처럼 차가운 이슬방울이 알알히 맺힌 참이슬과 테라 맥주를 섞은 테슬라 폭탄주 한잔의 이미지가 둥둥 떠다녔다. 그 술 한잔을 떠올리면 그 고통스러운 산행을 참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은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에는 고되고 힘든 수련생활에 단비가 되어주는 적절한 위로상품이 없었다. 그러다가 맥도널드를 지나치게 되었다. 

새벽 러닝 후엔 맥모닝이지!

새벽 4:40에 기상해서 5:20에 운동장에 모여서 러닝을 하는데 요즘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대개는 한 시간쯤 뛰거나 10km 러닝을 하고 마친다. 온몸은 땀으로 푹 젖어있어서 곧바로 근처의 짐에 가서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운동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는데 이쯤 되면 무척 배가 고픈 상태가 된다. 집에 가는 길에 보이는 맥도널드에 들러봤지만 아침 오픈 시간이 8시라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7시에 문을 여는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모닝샌드위치를 사 먹어보기도 했다. 뜨거운 커피와 베이컨치즈 토스트는 맛있었지만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그것보다 많은 양의 나트륨과 포화지방, 콜레스테롤이 담긴 고소하고 느끼한 음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략을 바꿨다. 

젖은 옷을 짐에서 뽀송뽀송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스트레칭을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으로 나누어서 정성껏 하고 시간을 보면서 코어 운동과 스콰트를 추가할 때도 있다. 그렇게 맥도널드 오픈시간인 8시를 맞추어서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해서 내 사랑 맥모닝을 주문한다. 

스타벅스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맥카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포화지방 가득한 해쉬브라운을 한입 베어 물면 빌드업 러닝 하느라 후반부에 숨이 차고 괴로웠던 순간의 기억이 눈 녹듯 사라진다. 버거처럼 부담되는 크기가 아니어서 만만한 머핀 샌드위치는 쫀득쫀득하고 따뜻하게 데워진 빵 사이에 그날의 기분에 따라 소시지나 베이컨을 계란에 곁들여 먹는 것이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조식'이라는 역할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예전에 술이 채웠던 자리를 이제 맥모닝이 채운다. 

술만큼은 아니지만 3-400칼로리에 나트륨과 포화지방 투성이인 맥모닝도 몸에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600킬로칼로리 이상을 태우고 2리터쯤의 땀을 흘린 나에게는 원하는 건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너그러운 허기가 있다. 먹어도 된다.


술이 주었던 쾌감보다 작지만 취기가 가시고 나면 의례히 밀려오는 후회와 속 쓰림이 없다. 

늘 혼술이었는데 오픈런해서 들어간 아침시간에 역시 혼밥으로 맥모닝을 먹으며 교통체증에 갇힌 채 출근하는 삼성전자 직원들을 창밖으로 바라보는  맛도 나쁘지 않다. 


이제 일 가냐? 나도 밥 먹고 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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