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몇 대 몇인데?
사고 후 한동안 도로에서 대형차량이나 특히 나와 사고를 일으킨 대형 화물트럭을 만나면 겁이 나고 가슴이 뛰어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들고 바짝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트럭들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지기 시작했고 소형차나 승용차 사이에서만 안심하던 운전 습관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쯤 내 자동차 보험회사의 '인적사고' 담당자라는 분이 전화를 해왔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사람이 다치고 자동차가 다치게 되고 수리비용과 치료비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래서 '인적' 담당자와 '물적'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통화의 요지는 사고 트럭 기사가 사고 후 몸을 다쳐서 통원치료를 받았고 이에 대한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내 보험사에서 50만 원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운전자는 실상 아무런 느낌도 없었을 사고에 이런 식으로 챙기는 거로구나, 나도 공범의식이 있어서 별 감흥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 사고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의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초롱초롱한 눈빛과 질의가 이어졌다.
'그래서 몇 대 몇인데?'
사실은 나도 정말 궁금했다. 내 사고조사 담당자는 매우 자신 있는 목소리로 9:1 또는 '100대 빵'도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전화를 해 온 상대방 보험사 담당자는 '안부 인사차' 전화를 드렸다면서 이런 경우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6:4나 5:5 쯤이 상식적이라고 했다.
10:0과 5:5의 간극이니 상식선에서는 절대로 해결이 안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대방 보험사 직원이 전화를 마치려던 순간 나는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경찰은 내가 피해자이고 상대 트럭이 가해자라고 판명해 주었는데 5:5라니? 하지만 우물쭈물 전화는 마음에 없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끝이 났다.
사고는 차츰 내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나는 일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마침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순서가 임박해서 전화가 울렸다. 상대방 보험사 직원이었다. 통화가 어려워서 나는 "제가 지금 병원이라서요, 나중에 통화할게요."하고 전화를 마쳤다. 이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 보험사 직원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병원에서 교통사고 관련 치료를 받고 있는 것, 혹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서 보험사 직원은 내가 이번 사고로 한몫 잡으려는 악성 사고자로 의심하게 한 것이다.
이후로 나는 보험사 직원 전화를 기다렸으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은 사고 합의를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피하고 싶었다. 몇 주가 지난 후 내 보험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 사정을 얘기하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해서 합의하자고 얘기를 꺼내라고 했다. 이 일로 계속 마음을 쓰고 싶지도 않고 빨리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했다.
이런 일을 통화로 수천 건은 해치웠을 담당 직원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시종 내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려주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면서 흥분도 하지 않은 나를 진정시켜 가면서 합의 금액을 제시했다.
99만 원!
자신의 오랜 경력과 경험으로 이것이 최선의 결정이며 더 이상 복잡하게 마음 쓰지 말고 당장 자신이 묻는 말에 동의한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내 계좌로 현금 입금시켜 주겠다고 했다.
선선하고 너그럽고 마음 씀씀이가 후한 누이 목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신차를 뽑은 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서 총 마일리지 10km를 달린 차가 순식간에 '사고차량'이 되어버리고 나는 병원과 이런저런 사고 후 잡무로 며칠을 내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후 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면 긴장과 스트레스로 마음을 조바심쳤는데 그 대가로 지급되는 액수는 99만 원이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 내 주 업무이지만 그것은 강의이고 내 강의의 대부분은 자신의 스토리로 영화를 제작하려는 학생들이 성공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매주 그들이 준비해 온 작업 내용과 일정을 점검하여 실수를 줄이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작업계획을 '조정'해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조정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설득'과 비슷한 면이 있다.
나는 그토록 너그럽고 후하고 선량한 보험사 담당자와 10여 분간의 통화를 더 이어가면서 내가 왜 99만 원보다는 많은 합의 비용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했고 의외로 그녀는 금방 수긍했다.
다시 한번 10여분의 시간을 들여서 이번에는 왜 내가 99만 원이 아니라 200만 원을 받아야 하는지 설득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큰 저항 없이 수긍했다.
내가 부른 액수 200만 원은 별 뜻이 없었고 즉흥적으로 떠오른 숫자였다.
그녀가 정색하고 묻는 질문에 나는 대여섯 번 '동의한다', '그렇다'로 답했는데 질문 내용은 내가 추후로 인적사고에 관한 일로 보험사에 소송이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알려준 계좌로 200만 원이 입금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물적사고에 대한 과실비율과 그에 따른 수리비 보상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내 차의 수리비는 생각보다 적게 나왔는데 부속품과 공임비 등 수리비 총합은 약 300만 원이었고 일단 자차 보험으로 수리비를 지급했기 때문에 나는 자기 부담금 50만 원을 지불했었다.
사고가 난 지 거의 석 달이 지난 지난주 과실비율이 결정됐다.
30:70
내 차의 과실이 30%이다.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과실비율에 불복하여 분쟁심의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까지 가는 일이 있고 신차의 사고차 등록으로 인한 감가 손해 등을 이유로 격락손해를 청구할 수 있다. 격락손해는 자동차 수리비가 차량가의 20%가 넘을 때 청구할 수 있는 것인데 내 경우처럼 20% 이하의 수리비용이 청구되었지만 출고 직후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 비슷한 사고의 성공 사례를 여러 건 찾아볼 수 있었다.
이번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기 전 나는 한 번도 교통사고를 경험해 보지 않았고 그래서 사고나 사고처리에 대서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보통 사람이라면 멈췄을 단계에서 더 나아가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시련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