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40여 년 가까이 운전을 해서 통학과 출퇴근을 하고 여행을 다니던 내가 처음으로 당한, 혹은 일으킨 사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지만 막상 벌어진 사고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개념이 없던 나에게 '교통사고 처리'는 신세계였다.
박살이 난 차옆에 쭈그리고 앉은 나에게는 계속 전화가 왔고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망설임 없이 내 개인정보를 털어갔다. 그들은 내 차의 보험사 직원, 상대방 차의 보험사 직원, 렉카차 기사, 렌터카 회사 직원이었는데 보험사 직원은 교통사고 조사관이었다. '사고조사 agent'라는 직책의 명함을 내게 건넨 내 차의 보험사 직원은 열정적으로 일하는 40대 남자였는데 넋이 나간 나를 안정시키는 모습이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더니 사고가 어떻게 일어난 건지 단박에 '감'을 잡았고 내 차의 블랙박스 영상을 보더니 확신을 가졌다. 능숙하게 그 영상을 자신의 휴대폰에 담아 가면서 그는 내게 일어난 사고를 마치 내 옆자리에 앉아서 지켜본 것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해서 설명해 주었다. 정신이 없던 나는 그의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천천히 되묻는 나에게 그가 다시 정리해 준 요점은 결국 '당신 잘못은 없으니 걱정 말고 집에 가서 쉬어라'였다. 나에게 꼭 필요하고 내가 듣고 싶어 한 말이었다.
<사고 개요>
1. 편도 3차선 도로에서 화물트럭과 승용차 사이에서 일어난 측면 접촉사고이다.
2. 선행하던 화물트럭은 2차선 직진 중이었다.
3. 뒤따르던 내 차는 3차선 직진 중이었다.
4. 화물트럭은 우회전을 하려고 했다.
5. 화물트럭은 차의 크기 때문에 3차로에서 우회전이 불가능하므로 2차선에서 우회전을 했다.
6. 3차로에서 직진 중이던 나는 화물차의 우회전 시도를 보고 차를 세웠으나 이미 우회전 중이던 화물 트럭의 우측 후측면부가 3차로에서 정차한 나의 좌측 전면부를 부딪혔다.
60대 중후반 혹은 70대일지도 모르는 화물 트럭기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형트럭의 우회전을 위해 미리 정차하지 않은 나를 질책하며 나는 교통법규를 모르는 우매한 가해자요, 자신은 불운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 차의 보험조사관은 상대방 보험사 조사관에게 내 차에서 찍힌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시켜 주면서 3차선에서 직진 중이었던 내 차의 운행중 2차선에 있던 트럭의 무리한 '차선침범과 우회전'을 언급했는데 상대방 조사관은 별 말없이 영상을 보고 돌아갔다. 상대방이 돌아가자 내 보험조사관은 상대 트럭기사가 무슨 연유에선지 '화물연대' 소속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일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한 상태라며 이럴 경우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과연?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까?
트럭기사가 다짜고짜 내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고 떠들어댈 때 나는 정말로 그에게 미안하고 내가 너무 조급하게 운전했다고 생각했다.
2차선에서 큰 트럭이 우회전을 하려 했던 걸 알았더라면 내가 미리 정차해서 트럭이 우회전을 안전하게 마치도록 협조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봐도 그 큰 트럭이 3차로에서 우회전을 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고는 목요일 오전에 일어났는데 토요일 오전에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다. 트럭 기사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극구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경찰서에 가서 교통사고 담당조사관에게 가해, 피해 확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경찰서를 간다는 건 일이 더 커진다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심란했으나 조사관은 덤덤했다.
'걱정 마세요, 5분도 안 걸릴 거예요.'
보통의 경우 가벼운 접촉사고에서 가해, 피해는 당사자들이 인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을 경우 경찰서 교통사고조사관이 사고영상 등을 참고해서 판단을 해준다고 했다.
토요일 오전에도 보험사 직원과 경찰서 '교통과'는 업무를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조사관의 말대로 정말로 5분도 안 걸려서 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경찰관은 내가 피해자이고 트럭 기사가 가해자라고 판별해 주었다. 그리고 보험사 직원과 경찰관은 당연하다는 듯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병원 가셔서 진단서 떼시고 제게 한 부 보내주세요."
병원?
내가 피해자임을 경찰이 입증한 마당에 사고 보상과 합의를 위해 나는 아파야 했다. 보험사 직원과 경찰은 나의 병원행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는 그들에게 진단서를 보내야 하는 숙제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니 마침 아내의 지인은 교통사고 전문 한방병원 의사의 아내였다. 곧바로 통화가 되었는데 병원도 멀지 않았고 전화를 건네받은 지인의 남편분은 병원에 일러두었으니 입원 준비물 챙겨서 병원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입원?
한 시간쯤 뒤 나는 ** 한방병원에서 입원수속을 마치고 병실을 배정받아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교통사고 후 요추와 경추에 불편함이 있어서 일주일간 입원을 요하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요추와 경추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50대 중년 남자 중에 허리와 목이 아프지 않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사실이 병원에 입원한 오후에 전달되었는데 사고 트럭 기사도 역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비를 요구하는 연락을 내 보험사에 해왔다는 것이다. 이 접촉사고로 내가 병원에 가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트럭 후미가 내 차의 옆을 긁은 사고로 트럭기사가 몸을 다쳤다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정말로 아프지 않아도 병원 치료를 받고 입원 시늉을 하는 것은 일말의 가책도 없이 누구나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야 피해보상금과 합의금 산정에 '도움'이 될 뿐더러, 다들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자칫 사고가 내 과실로 보일 수도 있으며 보험비에는 계산되지 않는 사고로 인한 내 차의 감가손실금과 다음 해의 자동차 보험료 인상분 같은 것에 대한 대체 비용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건 '보험 사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 와중에 입원 생활은 재미있고 신기했다.
교통사고 전문 한방 병원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 본 나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나처럼 사지가 멀쩡한 편이었으며 세끼 주는 밥을 건강하게 소화시킨 뒤에 일찍 먹은 저녁 식사 후 밤이면 족발이나 마라탕 같은 음식을 주문해서 나누어 먹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전에 병원 로비에는 보험사 직원과 사고 당사자인 환자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대화 내용은 비슷한 것 같았다.
과실 비율 얘기, 보상금 얘기, 합의 여부 얘기, 소송 얘기, 금감원 진정서 얘기 등등...
나는 아침과 오후에 목과 허리 치료를 받았다. 침도 맞고 저주파치료와 광선 치료도 받으며 처방해 주는 약도 먹었다. 하지만 나는 입원 전까지 매일 아침마다 10km를 달리는 마라톤 애호가였으며 입원한 당시에도 며칠 달리기를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기까지 했다.
지겨운 병원 생활이 끝나고 퇴원을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자동차는 수리가 완료되어 서비스 센터에서 병원으로 가져다주었고 보험사에서 렌트해 준 차량도 알아서 수거해 갔다. 신차 구입 후 차량을 인수하고도 한 달이 거의 다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차를 다시 운전할 수 있었는데 오랜 운전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고의 여파로 도로에서 트럭만 보면 움츠려 들었고 대형차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서 저절로 손에 땀이 나면서 긴장 되었다.
이런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