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청원 생명쌀 대청호 마라톤 대회 풀코스 완주 후기
좀 덥다 싶을 때 사람들은 '몇십 년 만의 더위'라거나, ' 내 평생 이런 더위는 처음이다'라는 식으로 표현들을 하는데 올여름만큼은 그런 말들이 전혀 호들갑스럽지 않았다. 정말로 더웠고 그 더위는 추석이 지나서까지도 이어져서 넌더리가 쳐지는 그런 밉상 더위였다.
그런 날씨에 펼쳐진 마라톤이라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마음뿐이었다.
제발 날이 좀 흐려서 볕이 좀 가려졌으면, 비라도 흩뿌려줬으면, 차라리 비가 종일 내리는 날이 낫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9월 28일 토요일에 열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나는 철원에서 열린 'DMZ 국제 평화 마라톤' 하프 대회에 나갔었는데 대회가 열리는 지역이 민간인 통제선 이북 철원 평야 지역이라 사람도 없고 가로수도 없는 뙤약볕 논밭 사이로 난 군사도로를 20킬로미터 달리며 그야말로 빨갛게 익어서 골인했고 화상으로 검게 탄 팔과 목 뒤, 다리는 한동안 쓰라리고 살갗이 벗겨지는 후유증이 지속되었었다.
DMZ 마라톤에서의 교훈으로 이번에는 햇빛에 노출되는 모든 부위에 선크림을 충분히 발라두었지만 작년에 참가한 경험자들이 전하는 유의점은 더위보다는 수없이 반복되는 업힐과 다운힐이었다. 코스의 고저도 그래프를 보아도 평지 구간은 별로 없었고 갈때 올 때 큰 업힐이 거인처럼 코스를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덥다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던 올여름, 나는 그 석 달을 고스란히 마라톤 훈련에 바쳤었다.
평소 같았으면 스페인이나 네팔의 히말라야를 찾았을법한 방학 기간이었지만 나는 온전히 가을 대회를 위해 몸을 만들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5박 6일의 일본 여행 기간 동안에도 러닝화를 챙겨서 아침마다 오호리 공원을 달리며 개인 훈련을 중지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 결실을 체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DMZ 대회 결과를 기대했지만 기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더위에 너무 진을 뺐고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한 여름이었고 그래도 이제는 추석도 지나서 열대야는 사라진 9월 말경이었다.
나는 나의 첫 풀코스 기록인 동아마라톤 4시간 39분 기록을 이번에는 무난하게 깨뜨릴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세상에 4시간 39분이라니, 이건 정말 창피한 기록 아닌가.
나는 내 기록 증명서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곤 했다.
저 4시간 39분 안에는 화장실을 세 번이나 가고 잠실대교는 걸어서 건넜으며 무릎 통증을 줄여보려고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앉았다 일어섰다 스트레칭을 했던 시간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화장실만 가지 않아도 기록은 단축된다!
이번에는 화장실에 들르느라고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고 걷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픈 무릎을 부여 쥐고 이런저런 통증완화 스트레칭을 한다고 경기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만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만 줄여준다면 20분 이상 줄어들 것이고, 그리고 여름 내내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서 달린 훈련 효과가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속도가 예전보다는 빨라질 것이고 그렇기만 하다면 나는 어쩌면 4시간 아래의 기록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은근한 기대감으로 경기 결과가 궁금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소속된 러닝크루에서는 이번에 대거 6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그래서 속도가 느린 편인 6분대 주자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사전에 같이 뛰기로 약속을 하고 열과 오를 맞추어 뛰었는데 가로 3, 세로 3 아홉 명이 6분 30초 속도로 시작했다.
평소에 5분대 속도로 조깅을 하던 게 익숙했기 때문에 무척 천천히 뛰는 속도였지만 경기 초반에는 많은 참가자가 무리를 지어서 속도를 내기도 어렵고 길도 좁았기 때문에 이 전략은 10km까지 나쁘지 않았다.
8km에서 에너지 젤을 하나 먹고 시작보다 한결 한산해진 주로를 달리는데 대통령 별장이라는 청남대 정원과 숲 속 길은 언덕이 자주 나오기는 했지만 참 아름답고 뛰기에도 좋은 길이어서 우리는 상쾌하게 달렸다.
더구나 오른쪽으로는 대청호가 아름답게 보이는 길도 잠깐씩 등장해서 환호성을 지르며 뛰기도 했다.
그렇게 초반 3분의 1쯤을 달리고 나자 복병인 햇볕이 본색을 드러냈다.
숲에서 벗어난 도로에는 그늘이 귀해졌고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인정사정없이 불볕을 내리꽂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6분 30초보다는 6분 속도로 뛰다가 오르막에서 6분 30초, 평지나 내리막에서는 5분 30초로 달렸으면 어땠을까 싶다.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속도이고 나는 오히려 너무 느리게 달리는 바람에 좀 답답했지만 9명이 함께 달리자고 뭉쳐있는 무리에서 튀어 나가기가 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다가 그동안 우리 무리를 이끌어주던 여성과 남성 한 명이 자기네들은 이쯤에서 DNF(Did Not Finish)하고 돌아가겠다며 반환점에 못 미쳐서 방향을 바꿨다. 우리가 달리는 청원 대청호 대회는 많은 사람들이 한 달여 남은 춘마와 제마를 대비한 훈련 성격으로 참가했고 그들은 완주를 하기보다는 30여 킬로미터를 달려보며 속도와 몸 상태도 점검해 보는 차원에서 일종의 LSD 훈련으로 사용하는 일이 흔했다.
햇빛은 뜨거웠고 리더 격이었던 그들을 따라서 돌아갈까 망설였지만 아직 힘이 남았고 조금만 더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마저 달리기로 하고 뙤약볕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것이 패착이었다.
25km쯤을 넘어서자 몸 이곳저곳에서는 삐걱대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20km쯤부터 시작되었던 오른쪽 발등의 통증이 심해졌고 왼쪽 무릎에서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30km를 지나자 그동안 물을 끼얹으며 젖은 채로 달렸던 싱글렛과 젖꼭지가 마찰을 일으키며 통증이 느껴져서 그냥 두면 유두 출혈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급수대 봉사자에게 반창고를 달라고 부탁해서 가로세로로 젖꼭지에 붙였는데 물기 때문에 안 붙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반창고가 견뎌내 주었다.
오른쪽 발등은 통증이 계속 심해져서 제대로 뛰기가 어려워졌다. 발을 지면에 철퍼덕 한 번에 닿게 뛰었다.
터벅터벅의 약간 빠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랬더니 통증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는데 대신 속도는 걷는 것보다 약간 빠른 속도여서 달린다기보다는 경보 수준이 되었다. 왼쪽 무릎도 계속 통증이 강해져서 이때부터 한 번씩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선두의 리더들이 슬기롭게 DNF를 선언하고 돌아 섰을 때 '무조건 직진'을 외친 패잔병은 넷이었는데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를 챙겨주며 같이 걷뛰를 반복했다.
이렇게 대회 후반부를 달리고 있는데 우리와 같은 팀 크루 회원이 길에서 쳐져 있는 것을 보고는 우리 팀에 합류시켜 같이 뛰면서 골인 지점을 향했다. 마지막 4, 5킬로를 남겨두고는 그 숫자가 일곱 명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40킬로를 넘긴 시점에서 나는 왼쪽 발등과 오른쪽 무릎 통증이 극에 달해서 아예 뛰기를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골인 지점인 경기장이 가까워오자 길에 나와서 응원하는 시민들 보기가 민망해서 억지로 뛰었다. 그렇게 뛰다가도 너무 아파서 멈춰 걸으면 그들은 "힘내세요!" "다 왔어요!"를 외쳐대서 통증을 참고 마저 뛰게 만들었다.
그렇게 골인을 했다.
4시간 46분 31초.
골인 지점에서 자원봉사자는 예쁘게 포장한 장미꽃을 건네주었다.
완주자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첫 번째 풀코스인 동아마라톤에서는 출발 즈음에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놓친 동료들을 찾는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페이스를 망쳤고 이어서 무릎의 통증이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너무 느린 속도에 맞추어 뛰느라 내 페이스 감각을 잃었고 발등과 무릎의 통증으로 경기 후반을 망쳤다.
왼쪽 무릎 통증은 금방 나아지고 통증도 없어졌지만 오른쪽 발등 통증은 피로골절로 의심되고 아직도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마라톤 이후로 아무런 운동을 하지 못하고 쉬고 있는 중이다. 바로 서울레이스하프 마라톤 대회가 코앞인데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 3주 뒤에 제마가 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몸 컨디션을 제대로 만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나와 같이 걷뛰를 하던 50대 친구가 힘든 몸을 끌고 가며 농담처럼 던졌다.
"10km나 하프를 뛰면 재밌고 안 힘들게 뛸 수 있는데 뭐 하러 풀 코스는 나와가지구..."
동감이다.
나도 10km라면 누구보다 즐겁고 기분 좋게 뛸 수 있고 부상 위험도 없다. 하프 까지도 잘 달릴 수 있다.
내년 겨울 대구마라톤과 봄에 동아마라톤까지 두 개의 풀코스를 등록해 둔 나는 한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풀 코스를 뛰는 게 맞는 일인가?
내 나이에 10km와 하프 정도를 아프지 않고 기분 좋게 달릴 수 있다면 그쯤에서 만족해도 좋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