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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모델에 관하여

인생의 롤모델에 관하여


나는 뚜렷한 롤모델을 두고 살지 않는다. MBTI 성격 검사의 결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인간은 여느 영웅 서사처럼 단일한 목적을 갖고 일관된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지 않는다. 대신 시공간, 관계, 역할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가장 최선이라 판단하는 결정을 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 “저 사람 원래 이러이러한 성격인데, 요새 좀 바뀌었어"라는 말을 한다면, 사람이 바뀐 게 아니라 상황이 바뀌었을 뿐이라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타인이 어떠하다 규정하는 일도, 심지어 스스로 어떠한 사람이라 규정하는 일도 즐기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어떠한 이미지로서 대변되는 롤모델로 나를 설명하는 일은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보석과도 같은 나의 수많은 모습이 가려진 채, 관점에 따라 밝게 빛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잘 인지하지 못 하지만, 가끔씩 발견하는 생경한 어떤 모습이 더 소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뚜렷한 롤모델을 두고 살지 않는다.



내 역할의 롤모델에 관하여


하지만 뚜렷한 역할이 존재한다면,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내기 위해 기능적으로, 부분적으로 롤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남편, 아들, 친오빠, 친구, 동료, 대표 등 내가 수행하는 여러 역할 중, 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롤모델을 교체하는 일을 반복했다.


대표로서 삼은 첫 번째 롤모델은 글로벌 채팅 api 서비스 ‘샌드버드’의 대표 John이다. 유튜브 존잡생각 모든 영상을 3번 이상 돌려보면서 그 사람의 사고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출퇴근을 할 때, 설거지와 같은 집안일을 할 때면 영상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 당시 나는 대표로서 a to z 를 모두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컸었다. 고이는 내가 몸 담은 세 번째 회사였지만, 대표로서 회사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표로서 회사를 성장시키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도메인/프로덕트/기술/투자/재무 등과 같은 techinical한 영역은 당연했고, 스타트업 그리고 회사로서 0에서 1, 1에서 100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당연히 초보 스타트업 대표를 위한 조언, 아티클을 많이 찾아봤지만 numbering된 형태로 파편화된 조언밖에 없었고,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John의 영상을 보았는데, 그는 상황별 지침이 아닌 사고할 수 있는 framework를 제공했다. 공간복잡성, 시간복잡성을 줄여준다는 측면에서 프로그래밍이 위대한 것처럼, framework는 세상이 돌아가는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쉽게 이해, 학습, 판단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 덕분에 우리 조직은 stage에 비해 돈을 버는 회사로서의 구조를, 혁신을 위해 달려 나가는 스타트업으로서의 구조를 잘 세웠고, 성장과 조직 문화가 양립하는 구조를, 고객의 가슴 아픈 상황에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과 죽음을 다루는 비즈니스로서 냉철하게 사고하는 이성이 공존하는 구조를 일찍이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 롤모델은 영어 회화 서비스 ‘링글’의 이승훈 대표님이다. 처음 링글 대표님의 브런치를 발견한 뒤, 2일 간 잠도 자지 않고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썼던 300여개의 글을 전부 정독했다. 우리 회사를 믿고 시드 투자를 리드했던 카카오벤처스 조현익 심사역님으로부터 오랫동안 존버하신 끝에 훌륭한 서비스, 기업을 일궈온 링글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고이도 그럴 수 있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지쳐있었다. 장례 산업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명감, 이 산업을 혁신하고자 하는 열망, 안 될 이유 99개 대신 될 이유 단 하나만을 바라보는 확신, 100살이 넘어도 2100년까지 대표로 일하면서 만들고 싶었던 큰 포부는 시행착오를 겪는 1년 9개월 간의 고된 여정 속에서 사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게 필요했던 것은 엄청난 전술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전장일지라도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은 마을 하나를 묵묵히 지켜낸 어느 장군의 위대한 이야기였다. 매일 이슬을 하나씩 흘려보내 마침내 큰 바위를 깨버리고 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링글 대표님의 이야기는 내 안의 불안을 다스리면서도, 우리가 도전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낙관을 버리지 않을 작은 촛불이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시련이 있을 때 금방 지나갈 거라 믿고 묵묵히 견뎠고, 내 앞의 문제에만 집중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작은 성취에 크게 기뻐했으며, 비즈니스와 서비스의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롤모델은 스타트업을 위한 금융 서비스, ‘고위드’의 김항기 대표님이다. 김항기 대표님의 재무 강의는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 시장의 관점에서 고이 비즈니스를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과거의 나는 당위성을 중심으로 비즈니스를 설명했다. 가치를 창출하고 주주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본질인 기업의 관점을 견지한 숙련된 대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철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 창업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려 2년 간 유지했던 회사 소개서의 절반을 모두 날렸다. 대신 시장과 산업이 어떤 구조로서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었고, 그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될지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무식하면서도 우직했다. 두 번째 롤모델인 링글 대표님이 컨설턴트로서 일하면서, 산업에 대한 본인만의 직관을 갖는 방법으로도 소개한 방식인데, rawdata를 한 줄 한 줄 들여다 보다 보면 바다를 끓이는 것처럼 아무 일이 없다가도 어느 순간 끓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연도별 - 나이별 인구 수 통계, 연간 사망자 수 통계, 장기 인구 추계, 연도별 출산 연령, 연령별 기대 자녀 수 등의 각종 통계를 csv로 다운 받고서 전부 다 외운다는 생각으로 한 줄씩 봤다. 또한 우리 서비스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떤 검색어로 어떤 페이지에 왜 방문하며, 방문자의 성별, 나이, 소득 등은 어떠한지, 우리 서비스를 실제로 쓴 분들은 왜 우리를 선택해 주셨고, 후기에서 어떤 말씀을 남겨주셨는지 모조리 봤다. 그 결과 나는 우리 비즈니스가 베팅할만한 큰 흐름을 발견했다. 과거의 흐름으로부터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베팅하는 일이 김항기 대표님이 알려준 사업의 요체였는데, 장례 시장의 부조리한 모습에 분노하는 철 없는 아이의 관점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점에서 시장을 뜯어보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새벽의 텅 빈 사무실에서, 반드시 변화할 미래에 베팅하는 진짜 사업가로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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