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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Dec 30. 2022

결국은 재입사

어떤 선택이 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8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퇴사하고 백수가 된 뒤로, 딱히 목적 없는 무념무상의 휴식이 이어졌고 때때로 멍하니 존재했다. 이렇게 낭비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내 인생에선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안이 들이닥치기도 했고 선택의 기로에서 여러 번 서성거리며 한층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리라 싶었지만... 나는 또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아있다.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재입사를 해버렸거든.

 

다시 직장인이 되어 버렸다 (@pixabay)


그러니까 대체 왜?

내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같이 보인 반응이었다. 일단 물음표가 기본적으로 세 번씩은 따라붙었다. 대체 왜? 다른 데 다 거절하고 왜? 돈 많이 준대? 이런 질문 폭격을 받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고 충분히 재고 따져서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나 말고 타인을 설득하기에는 썩 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이 이직을 결정함에 있어 연봉, 네임벨류를 중요하다고 생각할 텐데 그걸 최우선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라서.

그러니까 재입사 했다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쓸 수가 없었다. 그냥 미뤄두고 또 미뤄두다 보니 왠지 내 이야기가 멈춰있는 것 같아 불만스러웠다. 새해가 오기 전엔 막힌 곳을 뚫고 싶었다. 무책임한 말이지만 쓰다보면 정리될 때가 있더라. 글의 힘을 믿기로 했다. 



나는 도전을 좋아한다. 

애초에 도전하지 않고 멈춰있는 것이 싫어서 선택한 퇴사였다. 출근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했고 별일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고 지루했다. 그렇게 편안에 이른 순간, 퇴사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퇴사를 하고 나니까 재입사를 하는 게 도전이 되었다. 정말 삶이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퇴사하고 반년이 지나고, 대표님이 나를 불러내어 점심을 사주셨다. 그전에도 통화는 몇번 했다. 퇴직금이 아직 안들어왔으니 확인해달라. 고용보험 처리가 왜 늦어지냐. 등등 나의 일방적인 안부를 가장한 독촉전화였지만(..) 여튼 심난해보이는 얼굴로 마주한 대표님은 주문한 돈까스 접시가 상에 내려지기도 전에 이제 쉴만큼 쉬었으니 돌아오라고 하셨고 나는 돈까스를 입에 넣기도 전에 싫다고 했다.  

퇴사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더이상 회사는 다니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특히나, 이직처를 알아볼수록 맞는 회사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미 회사생활을 10년 정도 하면서 생긴 내 기준들이 있었고 이를 만족할만한 곳이 없었다. 창업을 하든지 프리랜서를 하든지 독립할 때가 된 것 같다 여겼다.


아무튼 그날, 대표님과의 대화는 무지하게 길어졌다. 대표님 생각에는 내가 쉽게 돌아올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 퇴사할 땐, 너무 지쳐보였기 때문에 일단 쉬고 오라는 생각이셨다고 한다.(실제로 휴직제안을 해주셨으나 깠다.) 성의껏 연봉만 좀 올려주면 바로 오케이 사인 보내올 거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대표님, 그동안 저는 더 늙었고 더 약아졌습니다. 후훗. 


달콤한 제안을 던져봤다가 동정심도 자극하는 대표님의 설득은 듣는둥 마는둥했다. 어쨌뜬 오늘 점심과 커피값은 굳었다!는 몹시 백수스러운 생각으로 슬슬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 찰나, 대표님은 마지막 필살기를 던졌다.

"조직 관리의 전권을 줄게. 회사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하고 해봐. 남의 돈으로 회사 운영해보라는 거 꽤 파격적인 제안이다? 책임은 내가 지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 

한량스러운 일상에 희미해져가던 도전정신에 불을 지피는 아니, 기름을 들이붓는 한마디였다. 부정할 수 없었다. 흥미롭다. 흥미로워! 연봉을 더 줄 수 있는 회사는 있었어도 조직 관리를 하게 해준다는 곳은 없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고 필요로 하는 경험이었다. 


네. 그렇게 제가 돌아왔습니다. 

10년째 회자되는 명언


복귀를 하고 바쁜 시즌을 한 차례 걷어내고 보니까 정신이 든다.

그렇네. 나 또 이곳에서, 또 이 일을 하고 있구나. 같은 공간, 같은 업무를 하고 있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조직이, 사람들이 달라졌고 나의 역할과 함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여전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이곳에서 짧은 시간동안, 이전에는 할 수 없었고 다른 곳에서도 허락되지 않는 일들을 해내고 있다.

 


참 재밌는 일이다. 

올해의 시작, 나는 이 회사로의 출근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별일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웠고 지루했다. 그렇게 편안에 이른 순간, 퇴사했는데 올해의 끝에 여전히 이곳에 있다니. 몇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그림이다. 역시,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내가 책을 쓰면서 느꼈던 게 있다. 당시에는 허비했다고 여긴 시간이 언제 나에게 몇배의 가치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실패라 여긴 도전이 나의 글감이 되었고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선택이 누군가에게 감동과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지금 어쩌다 해버린 재입사도 어떤 형태로든 몸집을 불려 맞닥뜨리게 되겠지. 부디, 그 순간에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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