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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Oct 02. 2019

사랑했던 직업이 미치도록 싫어졌다

드라마 종영과 함께 온 아빠의 암 선고


드라마를 만드는 내가 좋았다. 비록 시다바리처럼 느껴져 여의도 한복판에서 울어도 보고 작가님과의 엄청난 월급 차이로 때때로 현타가 왔지만! 그래도 이 험난한 바닥에서 잘 버티고 있는 내가 멋졌다. 기대만큼 본새 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청춘을 바치기에 딱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자존심 좀 구겨져도 금방 쫙 피고 웃을 수 있는 나이였고 밤샘 작업으로 피곤이 쏟아져도 레드불 한 캔이면 살아나는 체력이 있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면, 팀장이 늘 이야기했듯이 월급도 오르고 힘든 일은 내 선에서 컷트도 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 다 와봐라. 내가 이기진 못해도 버텨주마! 버티는 게 이기는 거지.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드라마 기획PD라는 내 직업이 꽤나 자랑스럽고 참 예뻤다.






조기 종영을 하네 마네 했지만 내 새끼는 원래 예정대로 16부작으로 끝을 마쳤고 그것만으로도 무척 대견했다. 무려 보조작가 없이 진행한 드라마였다.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게! 

다 나의 피, 땀, 눈물 덕분이라는 걸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았다. 방영 내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이게 끝나면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종영하니까 그런 마음은 또 쏙 들어갔다. 언젠가 그만두긴 할 건데 그래도 한 작품 더 하고 그만둬야지.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까우니까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겠어? 나를 다독이며 몇 달간 집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작업실에 널브러져 있던 짐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드라마 종영 후 보내는 첫 주말이었다. 주말에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였나? 

내 침대에서 늘어지게 늦잠을 잤고 오랜만에 가족과 식사를 했다. 특히, 주중에는 주로 출장을 다니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며 죽을 드셨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땐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거라 생각했다. 근 몇 달 만에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는 아버지였고 그간 내가 힘들다고 어찌나 징징거렸는지. 당신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버지의 취미는 마라톤이었고 술, 담배도 안 하는 엄청난 관리파였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으셨다. 언제나처럼 금방 털고 일어나시겠지 하고 말았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그 뒤 월요일, 회사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배불리 먹고 카페를 가서 여유 좀 부리자 하던 때였다. 아버지로부터 문자가 왔다. S 종합병원 암센터에 입원을 했으니 퇴근 후 들리라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문자였다. 다른 말도 없고 딱 저렇게만 쓰여 있었다. 아빠가 왜 암센터에 있어? 전화하고 묻고 할 새도 없이 택시를 잡아 탔다.



병상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큰 병이 든 환자였다. 집에서 보던 아빠와 왜이렇게 다른지. 집에 있을 땐 왜 몰랐지. 그동안 왜 몰랐을까. 내가 드라마를 하겠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 아버지 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는 아직 상황 판단도 안되고 있었는데 알아야 할 상황들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이미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고 했다. 드라마에서 그토록 자주 보았듯, 주치의는 아주 건조한 말투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내렸고 나는 그 앞에서 울기만 했다. 많이 본 장면이었는데 내게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나 낯설어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운도 지지리 없었다. 몇 달 전, 소화가 잘 안돼서 혹시 하는 마음에 검진을 받았었는데 그때는 의사가 발견을 못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병명은 발견도 어렵고 증상이 보이면 이미 말기라는 담도암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회사의 배려로 1시간 일찍 퇴근했다. 아직 동생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오전에는 엄마나 할머니가 오셔서 곁을 지켰고 저녁 시간 때에는 내가 매일 병원으로 출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가 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 붙어 있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때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직장을 다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기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직업의 워라밸, 복지, 월급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 다른 걸 고려하지 않았던 거다. 내 삶에 있어서 '드라마'가 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휴가, 자기 계발 같은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부모님과 쭉 같이 살았고 사실 결혼 전까지는 안전하게 부모님 그늘 아래만 있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월급이 적어도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철저히 '나'만 생각하고 일해왔다. 부모님의 자주 밤늦게 들어오는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나, 주말에 밥 한 끼 같이 못하고 출근하는 딸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만약 내가 매일 칼퇴하는 회사에서 일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주말에라도 가족들 얼굴 제대로 볼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일찍 병을 발견했을까. 죄책감이 들었고 후회가 되었다. 아무도 내 탓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탓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했을 시기에 나는 집에 있지 못했다. 아버지를 챙기지 못했고 대신 드라마를, 작가를, 회사를 챙겨야 했다. 집에서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보고 한 마디라도 더 나눴어야 했을 시간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그때의 나는 작업실에서 작가를 위한 식사 주문과 커피 심부름에 바빴고 대본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현장에서 날아오는 요구를 챙기고 PPL을 한 번이라도 더 노출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회사를 다닌다는 건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 건데 마치, 회사에 다니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살았다. 당시의 나는 그렇게 모든 생활이 회사에 맞춰져 있었다. 회사와 개인의 삶의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가기에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었다. 회사와 상사가 방법을 알려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그들은 미숙한 나의 중심을 회사에 잡아두고 그게 옳다고 주입시켰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줄만 알았지. 잘하고 있는 줄만 알았지. 바보같이.



그렇게 드라마를 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좀 가족과도 남자친구와도 시간을 보내야지 했는데.

그때 아빠의 암선고를 들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랑스러웠던 나의 드라마 기획PD라는 직업이 더 이상 멋있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많이 사랑했던 내 직업이 미치도록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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