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엄마의 투병일기
수술하고 치료를 마친지 1년 4개월.
오늘은 검진이 있었다.
지난주에 있었던 전신 뼈 사진과 복부 CT 결과를 듣는 날이었기에 더욱 긴장했던 것 같다.
지하철역에 내려, 언제나처럼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향한다.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쯤 이 길을 뛰어서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까.
다음 진료 즈음엔 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운동회 달리기 꼴찌는 언제나 나였다. 꼴찌를 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왜 꼭 달려서 1등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제는 오래 달려도 거뜬한 심장과 지구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검사 결과는 정상이라고 했다.
뭔가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으면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수가 없기에, 지난번 직장 검진 때 받은 결과를 이야기하며 다시 물으니 그제야 이해될만한 설명이 따라왔다. 결론은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나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굳이 주치의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평생 관찰하며 혹여 악성종양이 되는지 지켜봐야 하는, 내 몸에 생긴 또 다른 복덩이들.
언제 또 나를 항암산으로 끌고 갈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라도 내 몸에 신경을 더 쓰고 살아야 하니 앞으로는 이것들을 내 인생에 찾아온 복덩이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새로 시작한 일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가, 암 경험자들이 항암의 부작용으로 당뇨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보고서를 읽었다. 당뇨에 약한 유전자가 없어도 항암치료를 거치며 몸이 그렇게 바뀐다는 것인데, 요즘 많이들 사용하는 표적치료제와 면역치료제로도 그리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알게 된 20대 삼중음성 환우는 당뇨 초기에 진입했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당뇨.
우리 엄마는 당뇨가 너무 심하다.
이미 합병증으로 백내장과 골다공증, 췌장 질환까지 다 온 상황이다. 늘 아빠와 가족을 챙기느라 엄마 몸을 돌보지 못해 그리되셨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고, 엄마가 바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엄마 스스로 당신의 몸에 좋은 습관을 들이지 못해 그리되었다는 게 내 반론이었다.
체질상 엄마를 빼다 닮은 나는, 그래서 늘 불안했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분명 엄마처럼 살이 찌고 당뇨와 고혈압에 기타 등등을 온몸에 평생 달고 살게 될 확률이 높다는 그 직감적인 불안감 말이다.
아마도 당뇨에 취약한 몸일 텐데 항암까지 했으니, 이번 생은 망한 건가.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의사를 잘 만난 것 같다.
라이벌 병원에서 수술 뒤엎고 온 나에게, 그 병원에서 유방외과 교수님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수술을 하자고 했는지를 납득시켜줬던 의사를 만났다. 사실 내가 그런 결정을 했던 건 유방 복원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부분도 수술 방법이 바뀌면서 해결됐으니 이래저래 복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항암을 하게 되면서, 1년 6개월이 넘는 항암 플랜을 짜줬던 교수가 갑자기 학회를 가며 종양내과 담당의가 바뀐 것도 그랬다. 통상 그렇게 항암치료를 하지만, 항암투병 중에도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아이 엄마여서 그 루틴은 무리일 거라 했던가.
수술 전 검사에도 보이지 않아 수술장에서 발견한 악성종양의 크기가 애매하고 독한 녀석이라 항암제의 의료보험 적용을 못 받을뻔했는데, 심평원에 직접 문의를 넣어가며 의료보험 적용이 되도록 확인해 준 간호사님들을 만난 것 또한 복이었다. 비급여로 그 약을 투여했다면, 나는 약 값으로만 천팔백만 원가량 들여야 했다.
수술 전날, 병실로 찾아와 수술 진행 방법을 노트에 그려가며 설명해 줬던 그 유방외과 교수님이 이젠 종양내과만 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재발의 위험이 높은 시기는 지났으니 계속 종양내과에서 체크업을 하다가 혹여 재발이 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시 오라고 했다.
건강하라 인사해 주시는 그분께 정말 감사했다는 한마디를 더하고 나왔다.
정기검사를 받을 때면, 특히 몸에 무언가 약물을 주입해야 하는 검사를 받을 때마다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하고 살아야 할까.'
언제까지 내 오른쪽 팔은 주삿바늘로 벌집 쑤시듯 쑤셔져야 할까.
지난번 검사 때 내린 결론은, 세상 떠나는 날까지 기꺼이 이러고 살기로 한 것이었다.
인생은 앞날을 모르는 법이니까.
미리 비관하지 말기로.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 없이 합병증이 심각해져 결국 암에 걸려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시던 엄마는, 내가 밥솥을 바꿔버린 이후로 강제 식단 조절 중이시다. 그 후로 당뇨가 좋아지며 췌장의 혹도 줄었다 하시더니만, 이번에는 20년 넘게 함께 살아온 고지혈증이 사라졌다고 했다. 참 좋은 소식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자기관리를 못해서 몸이 그 모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라 어이가 없기도 하다.
엄마의 소식과 내 소식, 그리고 아이의 어린이집 수료로 기분 좋은 이야깃 거리가 많은 저녁밥상이었다.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내 곁에서 신경안정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남편이, 내게 에세이 하나를 읽어보라며 링크를 넘겨줬다. 자존감이라는 허상에 관한 글이었다. 아마도 남편은 내가 힘든 시기를 지나온 내 마음을 챙기길 바랐던 것 같다.
무슨 글을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썼는지 투덜대며 읽다가, 한 구절에 시선이 멈췄다.
지인 중에 암과 싸워서 이겨낸 사람이 있다.
그에게 "암생존자이시군요. 대단하세요."라고 말하자,
그는
"응. 그건 분명 대단한 일이야. 하지만 나는 나를 암생존자로 만 규정하고 싶지 않아."
라고 답했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 자존감이라는 괴물에게 지지 않는 법 / 박진영)
아이가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분명 애 아빠의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의 키였는데 말이다. 항암주사를 하암 주사라 하고, 항암으로 탈모가 온 엄마의 머리를 보며 해파리라고 깔깔 웃던 아이가 내년이면 학교에 간다.
나는, 오늘 유방외과를 졸업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내 목숨을 건졌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나이를 먹었으며, 여전히 자리는 잡지 못했고, 아이는 자랐다.
내가 아프다고 멈춰있던 동안 또래들은 저만치 앞서갔으니, 나는 이제라도 열심히 따라가야만 한다.
그래도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다.
유방외과를 졸업하고 다른 과 예약이 새로 잡히긴 했지만.
스스로를 토닥이며 참 잘 버텼다고 칭찬을 하다가 문득 지하철역에서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떠올랐다. 언제고 그 길을 거뜬히 뛰어가보겠다는 허무맹랑한 다짐을 해봤다.
내일의 삶은 모르겠다.
지나온 것들을 보면 늘 그랬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마음이 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이름은 같지만, 암 생존자로 살아갈 내일의 삶들이 “암을 발판 삼아 일어선 인생”의 한 조각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그냥 암경험자 말고.
그런 마음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