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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Nov 03. 2021

신앙이 유익하다는 그 말랑말랑한 생각

모태신앙 반항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이가 피아노 학원에 있는 시간이면 늘 학원 아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낸다. 문화공간으로도 사용되는 곳이라 철마다 바뀌는 사진작품들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최근 들어 카페 한쪽 벽의 구성이 달라졌다.

도자기를 빚는 동아리의 작품전이라고 했다.

동아리 수준이라 하기에는 제법 잘 만든 작품들이 한쪽 벽을 장식했다. 하나하나 보다가 눈길이 기승전 십자가에 멈췄다. 십자가를 모티브로 한, 묵상의 단상이 주제였다.


가벼운 시술 후 퇴원 예정이셨던 아빠는 그 후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당장 일주일 후에도 생존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수시로 던지고 가는 레지던트와 전문의들의 언어적 폭력을 견디며 우리 가족은 골방 같은 관찰실 생활을 이어갔다. 우리 가족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영적인 은사가 많은 권사님들과 목사님들은 영적 싸움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하기를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려본 적이 내 삶에 또 있었을까 싶다. 낮밤으로 기도했다. 같은 병동에 입원 중인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자신들도 신앙인이라며 짧은 응원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고,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안타깝고 애통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함께 울어주던 이도 있었다. 순간순간마다 마음속에 주시는 울림과 말씀과 음성을 가늘게나마 붙잡고 견디고 버텼던 시절이었다.


아빠가 그리 되신 그 병원에 갔다.

아빠의 일은 아니고 딸아이의 진료가 있어서였다. 언제부턴가 병원 정문 앞에 "우리 부인을 살려내라!"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이 계신데, 오늘은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는 차선 하나를 점거하고 계셨다. 아빠가 그리 되신 직후 나와 남편은 의료소송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의 지인이 있는 로펌이 마침 그 병원과 거래하는 곳이어서 다른 곳을 알아보려던 차에 아빠가 만류를 하셨다. 설령 소송에서 이긴다 한들 아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너의 꽃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을 원한으로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아빠의 그 결정에 주변 권사님과 장로님들은 역시 믿음의 사람은 용서도 남다르다는 말을 했던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항암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마친 바로 다음날 먼 길을 떠나셨다. 하나뿐인 딸이 1년 반을 넘기는 치료를 다 마치는 것만은 보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죽기 전에 아빠 집에 가보고 싶다던 그 바람도 실현되지 못했다. 집으로 오실 줄 알고 집에 들여놓은 의료용 산소발생기는 개봉도 하지 못하고 바로 반납을 했더랬다.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힘을 강조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하늘나라에서 고통 없이 행복하실 거라며 우리 가족을 위로했다. 사실 당시에는 모든 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음에 미련 없이 아빠의 천국행을 받아들일 수 있기도 했다.

남겨진 과부와 철 덜 든 딸내미는 신께서 보호해 주실 거라는 믿음도 함께.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교회활동이 중단된 지 어느덧 2년여다. 자연스레 나도 간헐적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연 중 두 번의 절기마다 우리 교회에서는 문고리 심방이라는 것을 한다. 교회에서 드라이브 스루 같은 형식으로 받아가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못하면 문고리에 선물을 살포시 걸어두고 가는 방식이다.

늘 심방이 잡히면 온 집에 먼지 하나 없도록 청소를 하고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장만하던 부모님을 보고 자랐던 터라, 우리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심방인데도 마음에 부담이 상당했다. 그마저도 이번 시즌에는 사는 것이 너무 바빠 제때 가서 받아오지 못해 우리 집에서 받게 되었는데, 그냥 선물만 받기 민망해 차 한 잔 마시다가 마음에 돌 하나가 떨어지는 일을 마주했다. 그마저도 늦게 내려가 대접 못하고 얻어 마셨지만..

가족에 닥친 어려운 시련을 기도와 묵상으로 견뎌내는 그룹장 집사님과 마주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대머리가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그 시절을 이겨내는 믿음이 참 대단하고 크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이의 말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맞은 대답을 고르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자신의 신앙은 작고 어려서 부끄럽다는 말도 이어졌다.

...

결국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냥 아이처럼 여리고 여린 신앙으로 평생 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 위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내 딴에는 진심 담긴 조언이지만, 듣기에 따라 조롱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께서는 늘 견딜만한 시험을 주시고 그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다.

그 시기를 복기하며, 가장의 의료사고와 외동딸의 암투병, 사위의 부동산 투자 실패까지 복합적으로 찾아왔던 그 시절의 고난은 대체 레벨 몇일까 궁금해졌다. 영이 맑아서 무당 아니면 목회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던 신학도 언니가 한동안 아빠 병실에서 엄마와 같이 밤새 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언니는 기도 끝에 아빠가 평생 쌓아놓으신 기도의 지경이 넓고도 크다는 말을 했고, 엄마는 네가 바로 봤다고 하던 그 어이없는 광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크고 넓은 기도의 결론은 의료사고인 것인가. 그 정도의 고난은 이겨낼 믿음이라 그런 고난을 당한 것이었을까, 사실 이 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차라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가볍고 가벼운 믿음이었다면 우리 가족의 인생은 좀 편했을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이 출근해 아이와 둘이 있는 주말이었다.

20여 년 전에 사뒀다가 교회 전도사님이 영적으로 좋지 못한 책이라 하여 읽다 말았던 책을 우연히 추천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언급이 있는 자기 개발서를 그 당시에는 영적으로 타락한 것이라 지탄했던 것 같다. 아이가 인라인을 타는 동안, 인라인장 울타리에 기대 서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생각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는 구절에 대해 글쓴이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내일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 부디 내일 일을 위하여 생각하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되 염려는 하지 마라."는 것이 저자의 말이었다.

"네가 받을 복" 그 복이라는 것의 존재를 언제나 강조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내 부모님을 바라보며 저 큰 신앙의 복을 분명 자녀인 내가 받을 것이라며, 모두가 칭송했었다.

하지만 그 "받을 복"의 존재는 성인이 된 나에게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무언가를 대비하고 준비하고 욕심을 내려할 때마다 "복주시면" 자연스레 될 것이니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그랬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성경적 교육을 받아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였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여러 기회들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놓쳐버렸다.

교회의 용어를 빌리자면 생각의 지경이 넓어지는 계기가 여럿 있었다. 그때마다 머리를 망치로 몇 대 두드려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들은 말은 "복주시면"과 "순종"과 "교만을 멀리하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뚫린 입이라고 독설을 내뱉으면 뒤이어 이런 말도 들어야 했다. "입으로 짓는 죄"

지금 생각하면 이 얼마나 단순하고 단순하며 폭력적인 언사들인지 모르겠다. 지혜와 총명의 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다른 관점에 대해 이리도 강압적이고 폐쇄적인가.

내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믿고 따랐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건 아름답고 고귀할 수 도 있지만, 일견 맹목적이고 일견 단순한 믿음일 수 있다고. ​

아이가 속해(만) 있는 교회학교 단톡방에서 신앙심 좋아 보이는 엄마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로 성장시켜야 하는 성경적 이유"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을 보다 그 방을 지워버릴 뻔 한 기억이 떠올랐다. 옆에서 운전 중인 친구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다. "너나 나나 그렇게 자란 순종적인 아이들인데, 난 내 아이가 그렇게 자라는 건 원치 않아. 얼마나 억압당하며 자랄지 빤히 보이는데 그렇게 자란 게 좋은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겠지?" 내 질문에 친구가 답했다. "그렇겠지. 그게 맞았던 사람들은."



생각해보면 나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부모님은 내가 청년부 안에서 연애해 교회 안에서 결혼을 하기 원하셨지만, 교회 오빠들 누구도 생각에 날이 바짝 서 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의 말랑말랑한 정신상태가 바보 같아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교회 밖에서 불신자를 만나 교회에서 결혼을 했다. 우리의 결혼을 두고 믿음의 승리이고 큰 은혜라는 말까지 들었었다. 그냥 서로 간의 합이었을 뿐인데 승리는 무슨.


아빠의 사고와 죽음, 그리고 내 암을 겪어내던 그 시간 동안 나를 견디게 한 원동력은 사실 "죽지 못해 사는 버티는 힘"이었다.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못 버티면 죽는 거라는 생각에 정신 바짝 차리고 어떻게든 견뎌 이 시기를 지날 생각뿐이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욥의 이야기를  읽고 옥한흠 목사님의 욥기 강해를 듣고 또 들으며 기적을 바라고 바랐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건 욥에게나 일어나는 일 인걸 알고 마음을 놓아버린지 사실 오래다. "받을 복"을 끝내 믿으며 기대하면 실망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그저 신이라는 존재에게 나는 너무나 확실하게 잡아놓은 물고기 같아서, 때로는 어장 주인처럼 때로는 악덕업주처럼 나를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몇 달 전 교회 매거진에 짧은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고난을 견뎌내고 내 삶으로 돌아온 삶에 대한 간증 글을 청탁받아 쓴 글이었다. 글의 결론은, 받을 복 따위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견뎌낸 것이 그 시절을 지나 온 비결이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글의 분량을 오버했는지라 편집이 되면서 그 부분이 잘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 부분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글은 죽었다. 믿음이 크고 굳건해서 삶이 당당하다는 말을 아직도 듣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런 시종일관 말캉말캉하고도 벽 같은 사고와 접할 때마다 깊이 분노하고 좌절하는 나를 보면, 확실히 그 문장은 죽은 것이 맞다.


모르겠다.

남들의 믿음 생활이 어떠하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그 몰캉한 펀치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정말 모르겠다.




상지 : 商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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