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다
한 솥 미역국을 끓이며 생각했다.
이것도 팔자인가 보다고.
방역당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면역저하자인 나는 코로나19 추가 백신 접종 대상자이니 신청해서 접종을 권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가 왜 면역저하자인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지만, 암 치료를 마친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정부의 기준이 맞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사실 부스터 샷은 권고이니 맞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바꿨다.
그리고 접종과 동시에 그 결정을 후회했다.
항암을 하던 당시, 우리 집 부엌에는 늘 된장국이 한 솥 끓여져 있었다.
항암을 하러 가기 전 날 꼭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미역국 끓여놓기와 쿠팡 로켓 배송으로 포카리스웨트를 주문해 놓는 일이었다. 된장국은 항암 직후 가장 몸이 힘들 일주일간 아이와 같이 먹고 지낼 최소한의 양식이었고, 이온음료는 물 대신 물처럼 마실 최선의 대안이었다. 물처럼 마실 이온음료가 필요했던 이유는 바로 끓인 보리 차인데도 썩은 물 같아서 전혀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하필 이온음료였던 이유는 병원에도 요양병원에도 입원해 링거를 맞을 수 없었던 현실에서 가능했던 최소한의 대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음식을 대용량으로 해 두지 않는다.
집안 곳곳에 무엇이든 쟁여놓는 엄마를 보며 학을 뗐던지라 음식이고 뭐고 저장해 두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한 번 끓인 국은 못해도 이틀 안에는 다 치우는 게 내 주방 습관이었다. 그게 깨진 게 항암 하던 시절의 된장국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랬던 한 솥 국을 다시 끓인다. 이번엔 미역국이다.
미역국은 피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고 알려져 있는데, 이와 비슷한 효능으로는 중금속 배출이 있다.
몸속에 유익균을 제공해 주고 항암효과를 보기 위해 된장국을 줄곧 먹었던 그 시절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정말 그저 생존을 위해 먹은 된장국에 누룽지 덕에 나는 항암 하는 동안 항암제로 인한 변비로 고생은 하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동안 중요한 일이 많았던지라 손도 대지 않았던 미역을 꺼내 물에 불리고 접종 맞을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바로 옆에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정육점이 있으니, 소고기는 접종하러 가는 길에 사 오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병원의 의료체계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비록 특정 병원과 병원 시스템을 맹신하시던 아버지를 의료사고로 잃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의료도 사람이 하는 일이나 한국 대형병원의 의료수준은 사실 어떻게든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켜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안정적으로 치료를 받았고 관리받고 있는 현재도 많은 이들의 생명과 시행착오로 만들어진 오늘이리라... 그러니 맞으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같은 별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내 접종 순서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예방접종 문진표는 눈 감고도 그리고 서명할 수 있을 것처럼 익숙하다. 사실 지난주에는 아이의 독감예방접종을 맞춰주고 왔는데, 이번 주엔 내 문진표에 서명을 한다.
지병이 있었고, 접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없으며... 개인 정보제공에 대한 동의까지 마치고 앉아 기다리는데, 내 옆에는 태권도 학원에서 이름도 모르는 남사친에게 왕만 한 반지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일곱 살 딸아이가 있었다.
첫 백신을 맞으러 갔을 땐 반팔 티 한 장이면 충분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분명 오른쪽 어깨에 맞을 테니 도톰한 맨투맨 티 안에 반팔 티를 껴입고 갔다.
혹여나 주사 잘못 놓아줄까 봐 화이자 부스터 샷임을 두 번 강조하고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이내 후회했다.
부작용을 알 수 없는 백신.
주사를 맞았는데 나는 왜 양쪽 어깨뼈가 아픈 거지.
???
나는 소고기 미역국을 좋아한다.
미역국도 종류가 참 다양하던데, 나는 꼭 소고기를 달달 볶고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한 미역국을 먹는다. 미역은 충분히 불려있으니 정육점에 사 온 국거리용 한우를 참기름 두른 냄비에 넣어 달달달 볶았다.
고기를 먼저 볶고 그다음은 미역 차례. 그다음은 쌀뜨물을 넣어야 하는데, 무슨 정신에서인지 오늘은 쌀뜨물을 버려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소고기 미역국은 어떻게 끓여도 맛있으니까.
어제까지 밤샘 작업이라 집에 못 들어왔던 남편이 오늘은 와이프가 백신 맞는 날이라면 반차를 내고 와서 미역국 끓이는 것과 아이 돌봄을 함께해 줬다.
나는 소고기 미역국을 좋아하지만, 사실 친정에서 가장 많이 먹은 건 전복 넣은 미역국이었다.
태어나 수도 없이 먹은 그 미역국들 중 내가 유독 기억하는 하루가 있는데, 바로 수능날 도시락이었다.
수능을 앞두면 볼펜이 바닥에 떨어져도 "떨어졌다" 하지 않고 "저기 붙었다."라고 한다던가.
내가 입시를 치르던 시절의 분위기가 그랬다.
죽은 시험을 죽 쑤니 안되고 미역국은 미끄러지니 안되는 수능날 수험생 도시락 기피 메뉴라고 했는데, 그걸 다 미신이라고 가뿐히 무시한 게 우리 엄마였다. 그랬다. 내 첫 수능 도시락 메뉴는 전복 듬뿍 들어간 전복죽에 전복 미역국이었고, 간식은 포도와 정관장 홍삼엑기스였다. 안암동에 있는 K 대학 수시 마지막 관문만 남겨놓았던 그 해 입시는, 수능을 망해버리며 보란 듯이 떨어졌더랬다. 생각해 보면 전복도 미역도 홍삼도 다 좋은 것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 체질에는 포도와 홍삼이 상극이라나 뭐라나.
부스터 샷을 맞고 하루가 지났다.
역시나 지난번처럼 온몸의 뼈가 분해되는 듯 아팠다. 이미 경험치가 있는지라 타이레놀은 넉넉하게 준비해놓았는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감기몸살이었다. 목이 잠기고 코가 막히고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고, 근데 귀는 왜 아픈 거지...?
지난 1,2차 코로나19백신 접종 때엔 남편이 집에서 간호를 해줬었다. 아스트라제네카 1차 때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열로 시름시름 앓었었는데 남편이 마트에서 사다 놓고 데워주던 전복죽이 그나마 먹히던 한 끼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말을 끼고 백신 예약을 잡았더랬다. 주말에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팔자인가 보다.
또다시 한 솥 가득 미역국을 끓이며, 이런 것도 사람 팔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로 예정되어 있던 남편 회사 작업이 하필 이번 주말로 잡혀버렸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갑님의 지시에 따르며, 혼자 일어나 어제 끓여놓은 미역국을 끓이고 흰쌀밥을 앉혀 아이와 아침 한 끼를 해결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 두 분 모두 맞벌이를 하셨던 남편은 푹 끓여낸 한 솥 음식에 대한 추억이 많다.
한 솥 오래오래 끓여두고 먹는 미역국 한 솥 오래오래 끓여두고 먹는 곰탕 한 솥 오래오래 끓여두고 먹는 카레 같은 것을 애정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끓여낸 미역국이 푹 퍼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미역국이 부들부들해지는 하루.
옷 껴입고 겨우 찾아간 가정의학과에서는 아이가 나 대신 모든 답변을 대신하려 했다.
"엄마가 열이 나서 내가 열 스티커를 붙여줬고요. 엄마가 어제 주사를 맞고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난대요." 공연히 혼자 분주하게 엄마 머리와 어깨를 주무르던 아이.
의사 선생님 앞에서 엄마 두피는 왜 마사지를 하는 것인지 어이가 없던 찰나, 아이가 말을 더했다. "엄마 나 킨더 조이 사줘."
오래도록 끓여 부드러워진 미역국만큼이나 엄마의 멘탈과 체력도 흐물흐물해지는 독박 육아의 일상이다.
미역국에 밥 말아먹고, 진통제 넣어 처방받은 약도 챙겨 먹고, 비타민C도 챙겨 먹고. 집 앞에 마침 오늘 개업한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천 원에 판매한다 하니 그것도 한 잔 챙겨 마시고. 그래도 주말이니 청소기 한 번 돌리고, 환기 시키고, 코가 막혀 향을 전혀 맡을 수 없는 안타까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어느새 하루가 지나버렸다.
남편은 언제 퇴근해 오나.
와서 빨래 좀 정리해 주라.
내가 미역국 오래오래 끓여놨으니까.
설마 부스터 샷 추가로 더 맞으라는 말은 없겠지.
제발 다른 부작용 없이 이 정도에서 끝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