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물던 자리

— 전환기의 윤리, 혹은 침묵 이후의 말

by 진경


나는 이제 어떤 말도 쉽게 쓰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말조차

너무 많은 손을 거쳐 닳았기 때문이다.


이제 말보다

침묵의 배치를 더 오래 고민한다.

누구에게 말을 건넬 것인가,

무엇을 유보할 것인가—

이 사회의 문장들이 언제부터

관점의 껍데기를 벗고 깃발의 몸짓을 배웠는가.


우리는 하나의 시절을 통과해왔다.

살아남은 자와 잊힌 자,

이윤의 편에 선 몸과

침묵의 편에 선 마음.

기억은 선택되었고

그 선택은 종종

폭력이 쓰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공적 언어는 증발했고

정치는 팬덤의 깃발이 되었으며

진실은 구독의 알고리즘 속에서

무수히 갈라졌다.

우리는 점점 더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 틈에서, 감각이 탈취된 시대가 자란다.

표정은 연출의 무대에 올라서고,

현실은 종종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났으면 하는 일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되는 것들 속에서 숨 쉰다.


그러므로 지금, 언어는

침묵하거나 거부해야 한다.

박수 대신 물음표를,

호명 대신 빈칸을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묻는 일—

그것이 내가 아직

말의 그림자를 좇고 있는 이유다.


빛이 머물던 자리는

더 이상 찬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서로를 향해 말을 시작할 수 있다.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응시하는 것.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것.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다시 광장을 만들 것이다.

열광과 환호를 멀리한 채,

침묵과 질문이 서로 기대어 앉고,

말과 말 사이 틈새로 바람이 통하는 자리.


#眞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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