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남편이나 그럴테지만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달라는 아내의 전화는 덜컥하게 만든다. "안좋은 일은 아니야"란 말이 그나마 진정제가 된다.
몇 군데 대학에 지원서를 냈던 모양이다. 한 곳에서 채용 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계약직 연구원 자리다.
다소 의외다.이제껏 아내는 작은 사무실을 내고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좋아하고 성과도 있었지만 적자인 시민활동 내지는 봉사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한 일이었다.
"당신, 어려운 거 아는데, 월급 조금만 더 올려줄 수 있을까?.... 막상 되고서 알아보니까 일은 무척 힘들 것 같은데 보수가 너무 적긴 해. 살짝 겁이 나기도 하고, 다들 말리네...."
내가 아는 아내는 공부든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또 그만큼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아내는 작은 녀석이 대학에 입학하자 오랫동안 염원했던 일반 대학원에 도전했다. 가까운 친구들이 매일 모이는 뜨개질 방도, 브런치 모임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아까운 시간인데 의미를 얹고 싶다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말렸다. 이제 좀 편해졌는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취미생활하며 즐기라는 것이었다. 친정 식구도, 하물며 어머니까지 나이들어 무슨 공부냐는 반응이었다.
그때도 나만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니 후속적인 학비지원과 가사분담은 온전히 내 몫이 됐다. 나는 경상도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다분히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주방 살림이 조금씩 몸에 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다.
"왜들 말리는데? ㅇㅇㅇ교수나 ㅇ박사는 뭐래? 그쪽 일을 잘 알잖아"
"그 사람들도 말려. 하지 말라고... 보수는 적은데 하는 일은 많고... 거기는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해서 스트레스도 심하고 힘들거라고... 이미 체계가 잘 갖춰진 좀 더 나은 자리를 기다려보라고도 하고... 실은 나도 지금이 좋긴 해. 내 시간도 많고.... 돈만 아니라면...."
"음.... 근데 냉정하게 생각해 봐. 아예 생각을 안한다면 모를까. 당신 나이에 취업? 쉽지 않아. 다른 좋은 자리가 나더라도 관련 경력도 없는, 그것도 나이든 경단녀를 쓰는 일은 극히 드물거야. "
"하긴... 면접에 박사 학위 가진 사람, 교수 경력 있는 사람도 왔었어. 그래서 나도 될 줄 몰랐어. 그런데 막상 되고 나니까 그렇다고들 하네."
(사람, 참 간사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10여명 중에 한 명으로 합격됐다니 최저임금 수준인 급여도, 예상되는 난관도 후순위로 밀쳐내게 된다.)
"지금 당신 하는 일은, 사무실도 정리해야 되는거야?"
"아니, 둘 다 할 수 있을 것 같긴 해. 그렇잖아도 상의해봤는데 내가 하겠다면 계속해주길 바라고... 퇴근하고서 해도 될 것 같아. 가끔은 주말에 보충하면 되고..."
"그럼, 해 봐. 부딪쳐 봐. 당신 뭐든 잘해내잖아. 분명 잘할거야. 하다가 정히 아니다 싶으면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그만 둬. 그래도 안늦어"
"그래? 당신은 내가 했으면 한다는 거지. 전공과 관련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이고, 새로 만들다시피 해야한다고 그쪽에서도 어려울거라고 몇 번을 강조하던데..."
"응, 나는 찬성이야. 그럼 내가 이렇게 해줄께. 당신이 말한 월급은 내가 맞춰볼테니까 돈 때문에 직장 다닌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그러면 아니다 싶을때 과감하게 때려칠 수 있잖아.....
다행히 염려했던 것보다 잘 맞고 또 어려운 일인만큼 잘해내면 분명 이게 당신의 레퍼런스가 될거야. 그렇게되면 자연스럽게 좀더 나은 자리에 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길테고.... 최종 결정은 당신이 해. 내 생각은 그렇지만 당신이 어떻게 결정해도 좋아. 그래야 후회도 없고 맞아."
"알았어. 해볼게."
아내는 내일부터 출근이다. 막상 이렇게 되고보니 아내가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어째 나는 내 무덤을 파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됐건 아내는 결과적으로 생활비도 오르고 취직도 했다. 나는 더 열심히 뛰어야 하고, 아내와 함께 놀 시간도 줄어들었다. 가사노동은 더 늘면 늘었지 줄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네고시에션(Negotiation)은 그나마 사업을 오래한 내 전공일텐데 아내가 더 고수일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은 뭐지?
뭔가 손해 본 장사를 한 것 같긴 한데 당한 기분은 안든다. 확실히 아내가 고수거나 내가 순진한 거다.
"아무리 힘들고 벅찬 삶이어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면 한결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 헨리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