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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누 Aug 04. 2023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내는 연습

나는 지독한 의미주의자다.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에서부터 그랬으니 아마 타고난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나의 발명가가 되고 싶었다.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원리를 익히고 실생활에 사용되는 제품에 적용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했던 재미없는 시간 동안, 꿈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발명가에서 디자이너, 디자이너에서 연구원으로 꿈이 옮겨갔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 오늘을 살았다. 그렇다고 현재를 희생하여 고통스럽게 시간을 버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의미주의자에게 가장 힘든 때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처음 찾아온 위기는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졸업 후 공학적 원리를 이용한 실험적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했을 때 삶을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내가 꿈꾸던 방향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기업에 디자이너로 취업해서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디자이너의 꿈을 접고, 시장원리에 기반하여 현실적으로 생각을 구조화할 수 있는 경영학 공부를 새롭게 시작했다.


두 번째 위기는 올해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바꾼 전공이었지만 감사히도 나는 경영학 연구가 잘 맞았다. 거시환경과 기업의 의사결정을 이해하고, 새로운 프레임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즐거웠다.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한다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연구 방향성에 대한 회의감에 끝없이 사로잡혔다. 선배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면, 모든 대학원생이 으레 겪는 일이라는 공허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기에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무모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살아갈 수 없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잘못된 방향을 인지한 순간에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는 없었다.


물론 대학원을 그만두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졸업논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순간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더 힘들었던 것은 무의미의 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그만둔 순간, 나는 그 무엇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돌아 다시 처음 질문 앞에 놓였다.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살기 위해 돈을 벌고 매일을 꾸역꾸역 채워가고 있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의미를 찾아 르완다로 떠나온 지 3주 정도 지났다.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지만, 그 도착점은 무의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있었다. 키갈리 중심 어딘가에서 앉아 천천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쩌면 의미는 그저 무지개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미 없는 행동들이 모여서 의미가 되는 건데, 행동에 의미를 찾는 어폐를 반복하니 의미가 발생하지 않아 고통스러운 시지프적인 반복인 셈이다. 매일을 살아가며 세상을 버틸 수 있는 마스터키는 무의미를 담보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앞서 말했듯 나는 타고난 의미주의자라, 흘러가는 시간에 그저 몸을 맡기고 한평생 떠다니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힘을 빼고 물결의 방향을 따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의미를 소거할 때 당장 오늘을 살아갈 행복이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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