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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리학과 학생 Feb 27. 2024

[우울증 극복기] 네 번째 이야기

모르는 게 약이라면서요

우울증은 유전적이다, 사회심리적이다, 정신질환이다.. 등등, 원인이 많고 그만큼 카테고리가 많은 이유는 발병되는 환경이 현재시대에서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질환들은 결국에 사회에서 나타났던 질병들이고 그 데이터를 모아서 기록하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없는 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저번에는 유전적인 것을 다룬 이유는 우울에 취약할 수 있는 유전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울할 때 그것 때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우울증에 대해 찾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유는 수백 가지다.

트라우마성, 스트레스성, 비만, 흡연 (연구에 따르면 흡연이 우울 강도를 높인다), 아토피 질환, 수면, 비타민 D 결핍, 여성 우울증, 남성 우울증, 산후 우울증.. 등등 심지어 합병증으로도 우울증이 동반될 때가 있다 (ex. 거식증). 어떤 이유가 됐든 간에 사실 갖다 붙이면 우울증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노출이 되기 쉽다는 뜻보다는 그만큼 사회에 많은 우울증이 많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약을 먹고 생물학적인 치료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질환은 조금 더 내다보면 심리적인 질환인 거라 말할 수 있다. 내 기분이 다운되는 이유는 다친 내 마음 때문이다 약은 내 마음을 치료해주진 않는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응급실로 찾아가야 했다. 저번에 갔던 병원에 가면 그분이 기다릴 거라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시스템이 존재했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땐 중요하지 않았다. 한두 시간 기다렸다가 내 차례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의사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선생님을 통해 내 얘기를 들었고 또한 내 차트가 있기 때문에 진료시간은 짧았다. 다만 지속적인 치료를 하기 위해 지금 처음으로 나온 거니 간단한 항우울제 치료만 받고 한 달 뒤로 진료를 잡았다.


하루에 한 번 자기 전에 약을 먹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고 사실 큰 변화는 없었다. 중간중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약은 최소 3주~4주는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6주부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고 예전과 상태가 조금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자는 날이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이상하게 배가 고픈 날이 있었다. 가장 많이 잔 날이 기억나는데 눈을 거의 뜨지 않았다. 24시간이 그냥 흘러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가족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기에 평일에는 나를 챙길 수 없고 또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방치가 아닌 배려해 줬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평생 눈을 감고 싶었다. 그래도 아침은 계속 찾아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기분이 나아지길 원했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 내가 아끼던 마지막 친구도 나를 배신했다. 내가 그를 멀리 한 걸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이해를 받아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육교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 걸터앉았다. 2월이었고 바람은 차가웠다. 쇠로 된 난간은 차가웠고 나의 체온을 뺏어갔다. 굳이 아래를 보진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무서웠다.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시간이 지나도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바로 뛰어내리지 못한 이유는 다른 한 마음에는 살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차가 비상등을 켜고 멈춘다. 잠시 내리고 뒤에 차들도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된다. 나를 보는 걸까? 상관없었다. 나는 다시 앞을 봤다. 밤하늘도 아니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망설이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됐을까?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경찰차가 보인다.


육교 쪽으로 4대가 오고 있다. 계단 하나씩 멈추더니 올라온다. 저 옆에 부모님도 보였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아무 생각 없었다. 감정도 기분도 의식도 다 메말라있던 느낌이었다. 그래도 안도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안도했고 걸터앉았던 난간에서 내려왔다. 경찰들 손에 이끌려 육교에 내려왔고 경찰관 남자 다섯 분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학생 뭐 하는 거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너는 이게 지금 재밌다고 생각해?"


그때 당시 단어들이랑 문장들이 몇몇 생각나는데 이게 스페인어로 들었던 거라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은 조금 어려운 감이 있다. 최대한 느낌을 살려보자면 내가 장난치는 거로 알고 계셨다.


"제가 지금 약을 먹고 있어요"


"무슨 약인데? 이름 알아?"


"항우울제라고 했어요"


"먹고 있는 이름 말해봐"


스페인은 약 처방할 때 한국처럼 '아침-점심-저녁' 요렇게 하나씩 봉지에 처방해 주는 것이 아닌 우리가 소화제나 타이레놀처럼 한 알이 들어있는 박스채로 준다. 그래서 그 이름을 물어본다.


"제가 받은 약은 (--)이에요"


"그건 약 회사 이름이고, 상자 이름 말고 항우울제 종류가 뭔데?"


"저도 잘 몰라요"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럼 무슨 문제인데?"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남자대 남자로 얘기해 봐. 여자 문제야? 학업? 부모님? 뭐든 솔직하게 얘기해 봐"


"..."


"구급차 불러"


구급차는 5분도 걸리지 않아서 왔고 나를 태웠다. 구급 대원이 소리가 크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셨고 정말 엠블런스의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으로 세 번째로 응급실에 다시 갔다. 옆에는 엄마가 같이 타서 갔고 그날은 환자가 별로 없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냥 멍했고 안전벨트가 되게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휠체어를 태웠다. 걸어갈 수 있었지만 안내하길래 그냥 탔다. 응급 진료실에는 한 정신과 의사분이 계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의무적으로 입원해야 합니다."


나는 엄마한테 통역해 드렸고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셨다.


"생일이 지났기 때문에 만 18세가 되어 여기 성인 병원에 입원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 여기서 입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때는 생각이 멈췄었다. 지금도 느낌으로만 기억을 해낸다. 그리고 나는 새벽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이렇게 치료를 시작하고 사람들의 관심도 받으며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살할 때는 충동적이고 순간적이다. 만약 내가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면 죽지 않을 만큼에 높이였지만 어딘가의 장애가 발생했을 것이다. 지금 그 순간을 되돌아보면 정말 많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그때의 나도 이해가 간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게 정답이 아니고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이 이해가 간다.


삶이 힘들고 슬프거나 우울감에 빠지신 분이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병원에 가시길 정말 간절히 바란다. 요즘은 한국도 많이 좋아져서 심리테스트 (TCI 등)도 많이 정확하고 약물치료만 하더라도 기분이 많이 나아지고 일상생활이 편해지기 때문에 꼭 그대로 두지 말고 병원에 한 번만 찾아가시길 이 글을 쓰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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