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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Nov 07. 2022

세계의 젊은이들이 위험하다

지금은 애도가 아니라 분노가 필요하다

캐나다 가을 학기가 중간을 지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2년 정도 대학 강의를 해봤지만, 다문화 국가에서 박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학생들은 그 폭과 깊이 면에서 더욱 다양하다. 오늘은 열심히 수업을 따라오던 한 여학생은 문득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 오지 못하겠다고 이른 아침에 메일을 보내왔다. 



"저는 러시아에서 온 국제학생인데, 친한 남자 친구들과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와 친척들도 동원이 될까봐 너무 두려워요.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오늘 수업은 못갈것 같아요"


사정을 들어보니 이 학생은 러시아 제재로 인한 항공편 중단으로 가족들을 보러 집으로 돌아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피아 구별을 하는 전쟁의 단선적 논리로는 대응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이 학생 옆에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이 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이곳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끌려가서 구금중 사망한 '마흐사 아니니'를 추모하며 이곳에서도 시작된 이란 학생들의 시위도 한국이란 공간에서는 크게 와 닿지 않을 뉴스일 수 있지만, 이란 학생들을 마주해야 하는 이곳에서는 많이 신경을 쓰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마다 적어도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정신적인 지원이라도 해야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더 폭넓은 감수성이 필요하다. 물론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네 하우스 파티만 가봐도 좁은 공간 안에 십여개국도 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 지구촌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믿겨지지도 않고 말도 할 수 없이 숨이 막히는 소식이 고국에서 들려왔다. 시차가 하루 늦기 때문에 할로윈 바로 전달 한국 할로윈 참사 소식을 들었다. 그 생각에 숨이 막힐 것 같은데, 하루가 지난 이곳 핼러윈 밤에 여기저기서 불꽃놀이의 포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참사로 떠나간 친구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와서 눈물이 났다. 



전에 가졌던 직업이 십 수년동안 국내외의 수많은 집회와 축제를 취재하고, 수많은 재난과 인명사고들을 목도하는 일이었다 보니, 이런 큰 인명피해는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사고에 마음도 심난하고, 도대체 얼마나 지나야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나 화가 나기도 한다. 그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는 현장을 많이 봐왔다. 만약 누구든지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보면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생명 앞에서 이데올로기, 욕망, 부와 명예 혹은 미움과 증오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삶의 모든 의미를 바로 세워버리는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허망한 죽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힘들지만 꼭 들여다 보아야만 한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소속감의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공직자들의 대응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거대한 집단 트라우마 앞에서 지금 정부가 대응하는 방식은 "주최자가 없다"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대규모 행사 매뉴얼(Major Planed Events guideline)과 인파 관리 매뉴얼 (crowd management)이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정부의 역할을 하나로 뭉퉁그린 것이다. 축제 기획 매뉴얼과는 별개로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곳에서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 서방 선진국들에서는 미디어와 교통의 발달로 더욱 더 큰 규모로 모이게 되는 군중들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십여년 전부터 군중과학(crowd science)이라는 이름으로 진지한 논의들을 해왔다. 영국과 미국도 이런 종류의 일들을 경험하였고, 특히 선진국들은 정보의 전파속도를 가속화시키는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규모 인력들이 모이는 행사들이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과 경고를 오래전부터 해왔다. 

  

위험은 미리 예측할 때 그 위험이 현격히 줄어든다. 십만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이 됐는데, 안전에 관한 예측이 안되어 있다라는 것은 그냥 현장에 무지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행사 주최 매뉴얼과는 별개로 집단이 모이는 장소에서의 위험을 예측하고, 모니터하고 인파의 원활한 흐름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중에 하나이다.


이번 참사를 '민간의 일', 혹은 사고로 부르는 사람들이 공직에서 없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위험할 것이다. 성별을 떠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또 학력과 고향과 관계 없이 안전은 우리생활의 토대가 되는 공통 분모이다.


더욱 슬프게도 이런 참사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20세기 말부터 '가벼운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핵심으로 하는 '굿거버넌스(good governance)'란 말들이 저개발국가 발전의 필요조건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정부를 개선하고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를 통해 효율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다라는 이 깔끔해 보이는 서사 뒤에 정부의 많은 책임이 사실상 민간으로 넘겨 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정치 수준이 높지 못한 국가의 시민들은 시민사회를 직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공권력으로 인해 오히려 사회가 퇴행적인 정치로 후퇴하는 것들을 공통적으로 경험해 왔다. 이런 흐름은 기술을 통해서도 가속화 되는데, 소셜미디어 중심의 소통 방식은 한편으로는 팬덤정치를 가속화 시키며 세계 곳곳에서 위험한 극우주의와 민족주의,그리고 독재자들이 배양될 수 있는 환경 또한 만들어 주고 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매일 소식을 함께 공유하는 신문, 즉 공통된 미디어 체험을 통해  국가의 소속감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앤더슨의 "가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를 되짚어 보면, 그 때와 다르게 우리에겐 지금 서로 다른 생각과 세대간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공통의 경험과 체험이 없다. 이런 공간의 부재는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세계 어디에서 온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해도 모두 공감하는 공통의 현상이다. 그래서 이런 토양에서 자라는 청년들이 걱정이 된다. 이들은 또한 경제적으로도 취약하다.  


이 곳 북미에서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부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다. 미국 베이비부모들이 상속 증여하는 돈은 4경원에 달할 거라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가 있었다. 시차가 있겠지만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 베이비부머들이 있다면 한국에는 지금 우리사회의 주축인 세대들이 비슷한 시대를 지나왔다. 개인의 치열한 시간들과 공통의 시련들도 분명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으면서, 그동안 구매한 집들과 투자한 상품들이 급등해서 얻게된 자본소득이 적지 않았다. 이런 시대적 순풍을 타고 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전혀 위험할 리 없다. 코로나가 증명하듯 재난은 차별적이다. 재난은 더욱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욱 혹독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로, 아니면 더욱 커다란 사건으로 쓰러져 가는 젊은 세대들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이런 취약한 세대를 파시즘이나, 젠더 갈등, 그리고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로 편을 가르고 있는 세계 곳곳의 정치인들은 사악하다. 취약함 속에 남겨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조리의 개선을 요구하는 거대한 연대이다. 정말 이들이 놀러간 것이 정말 문제인가? 정말 이번 사태는 교통사고와 같은 우발적인 불운이었나? 이런 구조적 취약함이 아직도 우리의 숨통을 막히게 하는 지금은 그래서 분명 애도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하는 분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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