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아 더 아름다웠던 낮의 트롬쇠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겨울나라에서는 항상 알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지 계속 현지 시간 새벽 1시 정도에 깨어나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다음에 깰 때쯤엔 날이 밝아있겠지, 날이 좀 밝아지면 일정을 시작해야지 하고 몇 번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알람이 울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였다. 하지만 여전히 바깥은 한밤중...
알람을 여러 개 맞춰두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밤인 줄 알고 자고 있을 뻔했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 하루 3시간이 되지 않기에 겨울 나라에서는 항상 알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단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에 짐을 맡아 달라고 한 후 밖으로 나왔다.
거대 장막의 정체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풍경 속으로...
오후에 예약해 둔 오로라 투어까지 시간이 좀 많이 남아서 오전에는 트롬쇠 도시 풍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가기로 하고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트롬쇠 주위를 둘러쌓고 있던 거대 장막이라고 느꼈던 것의 정체를 알게 됐다.
어제는 도시 전체를 거대 장막이 둘러쌓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이질적인 풍경으로 느껴졌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눈 쌓인 산이었고 불빛들은 산 아래 집에서 나오는 불빛들이었다.
트롬쇠는 눈 쌓인 산에 둘러 쌓여 있는 섬이었다.
밤의 트롬쇠가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스노우볼 같은 풍경이었다면 낮의 트롬쇠는 마치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을 보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겨울왕국 아렌델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오기 전까지 일에 사로 잡혀 있다가 그 풍경을 보니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뭐 누구를 탓하겠는가. 휴가 내내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내 성격 탓이었다.
길을 찾을 때가 아니면 휴대폰을 멀리하며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그곳의 나를 새하얀 설경 속으로 밀어내려 애쓰며 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트롬쇠 도시 풍경은 아이슬란드와 비슷하면서도 트롬쇠 쪽이 좀 더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잠깐 여행 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망대로 향했다. 사람들의 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서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멋진데 올라가면 전망이 얼마나 멋질까를 상상하면서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했는데 세상에...
바람 때문에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망대 밑에서는 정말 바람이라곤 하나도 불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이렇게 멀쩡한데 바람 때문에 운행하지 않는다고? 를 다양한 언어로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국어 영어 불어...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뉘앙스만 들어도 모두가 같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눈 쌓인 산길이라 그럴 엄두는 안 나고 내일도 트롬쇠에 머물 예정이라 내일을 기약하며 내려왔다.
전망대와 북극 대성당은 가까이에 있어서 내려오는 길에 북극 대성당 구경하고 (북쪽의 건축물들은 대게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지 않고 다리를 건너서 내려왔다.
어떤 블로그에서 여기서 맞은 바람이 살면서 경험한 최고로 심한 바람이었다고 전망대에 올 일이 있으면 꼭 버스를 타고 가라고 썼길래 얼마나 바람이 세길래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말이 허풍은 아니었다.
이 동네의 터줏대감인 새들도 제대로 날지 못하고 바람에 종이 조각 나부끼는 것처럼 휘청 휘청거렸다.
저러다 어디 추락하거나 난간에 부딪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인생 동화책
어마어마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다시 시내로 내려와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트롬쇠는 생각보다 더 활기차면서도 생각보다 더 작은 도시였다. 직선거리 안에 웬만한 관광명소와 호텔들이 다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북에서 봤던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펍, 최북단의 버거킹(이제는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보고 싶었던 도서관 모두를 찾았다!
어제는 가보지 못한 곳까지 좀 더 구경을 하다가 기념품 가게에 내 취향을 저격하는 엽서들을 발견했다. 엽서 한 장을 6,000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는가 그냥 사진으로 찍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잠시 고민했지만, 너무나 취향 저격이어서 고르고 골라 엽서 2개를 사고 구경을 하는데 그 엽서와 똑같은 표지의 동화책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동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전혀 알 수 없는 노르웨이어로 쓰인 동화책이었지만 책 한 권을 내 마음으로 그대로 흡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가가 상상을 초월하게 비싸서 아직까지 밖에서 밥 한 끼, 커피 한잔 사 먹은 적이 없었는데...
동화책 치고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돈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어서 동화책을 사서 품속에 고이 넣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