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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Nov 24. 2023

키키와 케나

올해 봄.


서울에 갔다. 전시를 보았다.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돌담길을 지나 미술관을 마주했다. 작지만 운치가 있는 정원에는 벌거벗은 인간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이 움츠려 앉아 땅의 표면을 바라본다. 개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는지, 땅 밑에 묻어버린 비밀들을 보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울한 사람들 모여 앉으니 그럭저럭 서로 위로가 되는 양 보였다. 때가 되면 하나둘 제 마음을 쫓아 홀로 설 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없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원은 어색할 듯하다.  


아무튼, 나는 매번 마주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전시실로 들어섰다. 키키 스미스(kiki smith)라는 작가의 이름이 보였다. 주말치고는 한산했다 - 작가마다 유명세가 다른 걸까.


키키가 표현하려던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제 자신만이 알 테지만, 그날의 전시는 '몸'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었다. 그 봄 무렵의 나는 어디선가 몸은 마음의 표현이라는 문장을 습득한 후에 온통 그것에 관한 생각뿐이었니까.  


긴장을 하면 다리나 손이 떨린가든가, 공포를 느끼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든가 하는 일들은 익히 알고 있다고 여겨왔지만 어쩐지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생소했다. 수십 년간 움직여온 몸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그 둘이 마치 별개의 기관 같았다. 쉽게 말하며, 몸이 아닌 머리에서 유발되는 쾌나 불쾌가 감정의 근원지 같았다.


이후의 나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자연스러운 일들을 감지하려고 애를 썼다. 수영을 할 때도 최대한 멀리 양 꼭짓점을 찍었다. 손끝과 발끝을 의식하며 헤엄을 쳤다. 어느 순간에는 그 사이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공간이 생겨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 사이로 감정들이 오간다. 


달라진 나는 무척이나 인자하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내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외부의 것들을 너그럽게 바라본다기보다는, 어린아이의 공간감이다. 무엇이든 쉽게 후 들이마시고 후 내쉬어버린다. 


미음과 미음이 위아래로 나란히 놓인 글자의 구조마저 안정감이 드는 [몸]이 나의 아지트가 되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습관처럼 머리로 반응해 온 감정들은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시의 나였던 탓에, 나는 한참을 서서 키키스미스의 <자유낙하>를 마음에 담았다. 몸의 모든 무게를 실어서 공중을 가르는 일에 '감정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붙여보았다.


내면을 파고드는 것들이 만족스러워서 굳이 해설은 보지 않은 채로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여담이지만, 나는 사실 얼마든 그런 식으로 전시를 감상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편이다 - 여타의 예술에 비하여 더 자유로운 것이 현대미술 같아서, 그러한 속성을 존중한다면 얼마든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나 감각에 빠져들어도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다고 믿어본다. 





키키의 작품들을 보고 난 발끝에 무게가 실린다. 두툼한 굽이 있는 신발이지만 발바닥으로 고르기 않는 땅의 질감이 닿는다. 


나는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들을 보러 간다.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 사진 속 그것들이다. 낮과 밤, 눈과 비, 여름과 겨울 속의 나무들의 개별적인 모양새가 색을 배제한 사진으로 남았다. 형태에 중점이 실린 나무들은 우아하고 신비로웠다. 그 나무들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을 테니 그것은 분명 아름다움을 넘어선 신비였다.


집으로 돌아는 차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겨울나무의 가지들의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스쳤다. 평소의 나라면 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에게서 살이 발라진 생선의 뼈대를 유추해 냈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작가의 세심한 눈길과 마음으로 기록된 나무들은 겨울에도 푸르렀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무언가를 관찰해 내는 일만큼 커다란 사랑도 없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나는 겨울나무의 미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겨울을 기다렸고, 마침내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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