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백화점이었다. 검은 케이크 위로 빨간 모자를 쓴 흑토끼가 보였다. 아, 올해는 흑토끼해였다. 연초에는 알아두었던 사실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쨌거나 삼백육십삼일이 무심히 지나갔다.
2024년을 삼일 남겨둔 오늘. 새로운 다짐을 해둔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
Podcast '여둘톨/여자 둘이 토크합니다'에서 들은 것이다.
대충 흘려들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미션 같지만 막상 마음에서 입으로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 동작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렇다. 예를 들면 편집증이 있는 엄마에게서 자란 나 같은 사람이다. 우리 집은 엄마의 감정대로 흘러가야 소동이 없었다. 음식점에 가서도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밥을 먹어야 했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은 나에 대한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치솟는 분노에 나는 결국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영화 <레이디버드>의 주인공처럼 도망치듯 자유를 쫓았다. 엄청난 해방감에 속이 후련해지기도 했지만, 좋아한다는 그 감정에 죄책감과 무게감이 더불어 기생했다. 더 문제는 좋아하는 걸 끝까지 좋아해 내지 못할 때면 나는 혼자가 되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비어버린 채로 방황을 한 탓인지, 어느 순간에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축복 같은 감정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말을 할 때도 좋아한다는 질러 말하기보다 에둘러 말하는 데에 익숙했다. 반대에 놓인 걸 싫어한다고 하면 그만이었다(싫을 때는 반대에 놓인 게 좋다고 해버렸다).
정 반대의 성질의 것이 불가분의 관계에 머물렀다. 솔직히 어떤 의구심을 같지 못했다. 그것에는 상대를 덜 기분 나쁘게 하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여둘톡을 들을 때마다 듣게 되는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는 나를 멈춰 세웠다. 가만히 듣다 보니 그것이 꼭 해방의 구호처럼 들렸다. 나도 새로운 화법으로 말해보고 그저 좋아서 좋아한다는 감정을 동네방네 떠들어 보고 싶었다.
(용감하게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우선 여둘톡이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좋다. 김하나 작가님이 구사하는 적합한 단어들은 명확한 시야를 확보해 낸다. 그러면, 황선우 작가님의 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뒤따른다. 마치 이 세상에는 제대로 보아야 할 일도 있지만, 제대로 웃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듯이 쿵작이 잘 맞는다. 어떠한 주제를 두고도 능숙하게 각자의 음성을 조율하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균형감을 유지한다.
이탈의 위기도 있었다. <우영우>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연애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는 일침에 다소곳이 청취를 이어갔다. 사실 얼마 전 본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도 결국 연애사가 곁들여졌다. 마음의 아픔은 쉬쉬하기보다는 드러내야 한다는 전반적인 흐름과 틈틈이 구사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사들이 좋았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나를 도와주는 상대와의 사랑은 물론 아름답고 이상적인 일이지만, 사실 자기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는 편이 좋다. 그래야 온전히 살아낼 힘이 자신에게 생긴다. 물론 나도 아주 나이가 들어서야 그러한 말이 야박한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믿어주는 관대함이라는 걸 알게 되는 했다.
매 회 들을수록 빠져드는 통에 네버엔딩처럼 호감들을 전부 다 써 내려갈 수는 없어도, 단 하나 정도를 더한다면 여둘톡에서 전해 듣는 청취자들의 이야기이다. 듣다 보면 우리 동네 어딘가에도 여둘톡을 듣는 톡토로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아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다 자꾸만 다정해진다.
아, 그리고 음미체(음악, 미술, 체육)의 강조도 알싸한 톡깔(톡토로만 아는 무엇이다)도 빠지면 서운하다.
단 하나 엇박을 타고 있는 게 있다면 운전이다.
원래는 운전을 했는데 집안의 경제사정으로 차량을 한대 줄인 후로는 운전대를 놓았다.
그러다 슬렁슬렁 버스를 타고 다니다 새로운 재미를 깨우쳐 버렸다. 목적 없이 걷다가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느슨함이었다.
숙취를 몹시 싫어해서 취하는 데까지 마시는 일을 드물지만, 틈틈이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그것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눈을 감고 스페인을 그려보게 한다. 어디를 가도 작은 접시에 안주와 마실거리를 내어주는 나라. 아마 그곳의 사람들이라면 삶에 보탬이 되는 간헐적 여유에 대하여 너그러울 테다. 여전히 올해 할 일 목록에 '다시-운전'을 적어둘지 미지수지만, 그래도 여둘톡은 좋다.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는지,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는데에 목적이 있어 여둘톡도 들쭉날쭉 당기는 제목대로 들었지만 이제 차분히 정주행을 해야겠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올라온다는 화요일을 기다리게 된다던 마음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
딱 삼일 후부터는, 무엇이 싫다는 반동보다는 무엇이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볼 요량이다.
십 분의 일만큼 좋은지, 십 분의 삼만큼 좋은지, 십 분의 칠만큼 좋은 지도 생각해 보고, 좋아하는 그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도 가만히 지켜볼 테다. 어떤 일은 취미가 되고 어떤 일은 추억이 되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잘 해낼 자신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라며 스스로를 볶아치지 말아야겠다. 정말로 그래야겠다.